서울 도심의 풍경이 마음에 담기는 곳, 봉산을 아시나요?
●뜻밖의 풍경, 산속의 우물
봉산을 아시나요? 서울 서쪽 한강 물밑으로 흐르는 지맥이 난지한강공원으로 올라와 서울월드컵경기장 북서쪽에 매봉산을 세웠다. 매봉산 북쪽은 사람 사는 마을과 경의중앙선, 공항철도 등 기찻길이다. 기찻길과 마을에 잦아들었던 산줄기가 다시 시작되는 곳이 수색동이다. 그곳이 봉산 남쪽 끝자락이다. 봉산 북쪽 끝은 서오릉로에 닿는다. 봉산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다. 한강 북쪽 서울 서쪽 끝에서 북쪽으로 내달리는 봉산은 서울과 경기도를 나누는 경계선이며 한강 이북 서울 서쪽의 벽 역할을 하는 산 중 하나다.
봉산은 봉수대가 있었던 산이다. 서울월드컵경기장 북서쪽 매봉산을 망봉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표기한 지도도 있는데, 오기 아니면 옛 이름일 것이다. 옛 이름이 맞는다면 망봉산은 봉산을 바라본다는 뜻일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봉산에 있던 봉수대가 그 이름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서울의 서쪽 벽, 봉산을 지금까지 네 번 걸었다. 그중 봉산의 남동쪽 끝자락에서 출발하는 길을 소개 한다.
출발지점은 증산역이었고, 이면도로 지나 주택가 골목을 돌아 본격적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은 구립은평어린이집(서울시 은평구 증산로9길 44-12. 옛 주소 증산동 92-143)이었다.
구립은평어린이집을 지나 산 쪽으로 약 100m 정도 가면 골목이 끝나고 산길이 시작된다. 봉산의 남동쪽 자락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산을 시루봉 또는 반홍산이라고 불렀다. 증산동의 '증산'이라는 이름도 시루를 닮은 산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시루를 뜻하는 시루 증(甑)자를 썼었는데, 지금은 비단 증(繒)자를 쓴다. 1800년대 중반까지 시루 증(甑)자를 쓴 기록이 남아있다. 봉산 등산로 중에 증산체육공원에서 시작하는 길도 있는데, 증산체육공원 축구장 이름이 비단산축구장이다.
구립은평어린이집을 지나 산으로 접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산속에서 우물을 보았던 것이다. 옛날에 오금이 저리도록 무서웠던 연속극 '전설의 고향'에서 보았던 우물을 닮았다. 깊은 밤 으스스한 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속 우물에서 소복에 산발을 한 귀신이 '스윽' 나오던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실 이곳은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다. 우물 옆에는 마을 사람들이 가꾸고 있는 산신제단도 있다. 산신제는 수백 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산신제를 지낼 때 이 우물물로 밥을 지어 제단에 올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의 말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다.
●팥배나무자생군락지
수백 년 전부터 있었던 우물을 지나 봉산 능선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을 걷는다. 산이 크지 않고 높지 않아 어렵지 않게 능선을 만났다. 봉수대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능선길은 걷기 좋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초록 숲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걷고 싶은 마음이 인다. 보고 있으면 걷고 싶어지는 길이다.
돌무지와 운동기구 몇 개가 있는 숲속의 작은 터는 북한산까지 시야가 터지는 곳이기도 하다. 나뭇가지 위로 북한산 보현봉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북한산을 보며 물 한 모금 마시며 쉰다. 할아버지 한 분이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작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유행가를 듣는다. 라디오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귀 기울여 들으며 걸었다. 노래 소리가 끝나는 곳부터 숲의 새소리 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렇게 걷는 길에서 만난 건 봉산 생태경관보존지역 안내판이었다. 이곳은 팥배나무 군락지다. 안내에 따르면 서울의 다른 팥배나무 군락지에 비해 규모가 크다. 지금까지 알려진 서울의 팥배나무 군락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팥을 닮은 붉은 열매에 작은 반점이 보여서 팥배나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팥배나무 군락지 산비탈에 놓인 데크길을 걷는다. 팥배나무가 촘촘하게 박힌 숲 바닥을 굽어보기도 하고, 데크길로 뻗은 가지를 어루만지기도 한다. 팥배나무 군락지 산허리에 놓인 데크길은 다시 능선길로 이어진다.
●편백나무숲과 봉수대 터
봉산에서 팥배나무 군락지와 함께 유명한 숲이 편백나무 숲이다. 팥배나무 군락지를 지나 편백나무 숲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산속의 숲, 숲속의 숲이다.
2014년부터 만들고 가꾸고 있는 편백나무 숲이다. 나무가 크지 않다. 아직 어린 편백나무 숲이지만 숲 향기가 진하다.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난 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숲을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 편백나무 숲과 숲 밖에 펼쳐지는 서울의 풍경을 함께 즐길 수도 있다.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 펼쳐지는 편백나무 숲과 멀리 청계산, 남산, 안산, 인왕산, 백련산, 북한산, 그리고 그 산들이 품은 서울 도심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있어도 그 풍경이 마음에 담긴다. 잠깐 쉬려고 했는데 오래 머물렀다.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마음을 먹고 일어서서 봉수대 터로 향했다. 조선시대에 봉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봉수대가 있던 곳을 알리기 위해 봉수대를 재현했다. 봉수대가 있던 곳이니 전망이 좋은 것은 당연한 것. 시야가 사방으로 터졌다. 봉수대를 재현한 곳, 정자 등 산꼭대기 넓은 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망을 즐긴다. 북한산, 인왕산, 남산, 안산, 청계산, 관악산, 계양산, 망월산, 개화산, 하늘공원... 먼 풍경까지 꼼꼼히 짚어가며 풍경을 읽는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 3.1만세운동의 하나로 사람들은 이곳에 올라 횃불을 밝히며 만세운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봉수대 터를 뒤로하고 하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새겨진 시비가 있는 쉼터에서 봉산 여행을 마쳤다.
하산 음식은 산에서부터 생각났던 평양냉면이었다. 일행 중 다른 음식을 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만포면옥 평양냉면을 먹으며 봉산 하루 나들이를 복기했다. 이야기는 길어져 해가 기울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쪽 밤하늘에 초승달과 저녁샛별이 낮게 걸쳐있었다.
▶여행+
만포면옥 평양냉면과 수육
산에서부터 시원한 평양냉면이 생각났다. 평양냉면 특유의 육수 맛이 산에서부터 입에 맴돌았다. 산에서 내려와 배고픔을 참으며 구산역 부근에 있는 만포면옥까지 약 1.7km를 걸어야 했지만, 그리고 그 길에 음식점도 숱했지만, 산에서부터 생각나 입안에서 맴돌던 평양냉면 맛을 잊게 할 음식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영접한 만포면옥 평양냉면. 먹고 있어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물론 산에서 내려온 배고픔과 갈증 때문에 더 그랬겠지만, 금세 국물까지 싹 비운 텅 빈 냉면사발만 남았다.
만포면옥 안내 문구에 1972년에 문을 열었다고 적혀있다. '동치미와 육향이 조화를 이루는 육수'란다. 만포면옥을 처음 시작한 창업주가 평안남도 용강 출신이라고 한다. 건너편 식탁에서 먹고 있는 만두전골도 맛있어 보였다. 만두전골 대신 수육을 시켰다.
글·사진 장태동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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