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호우의 시대]① 경험 못한 재난이 온다…근본 틀 바꿔야
대응 느리고 투자 적어…'100년에 한번 발생' 기준 손볼 필요
(서울=연합뉴스) 이재영 계승현 기자 = 지난 11일 서울 동남부 일부에 '극한호우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된 이후 극한호우란 단어는 빠르게 일상어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25일 장마가 시작한 뒤 집중호우보다 2배 이상 강한 비가 매일 어딘가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14명 목숨을 앗아간 지하차도 침수 사고가 발생한 충북 청주시의 지난 15일 일강수량은 256.8㎜였다. 지금과 같은 기상관측이 시작한 1967년 이후 청주시에서 3번째로 많은 양이었다.
하지만 근래에 비슷한 사례가 없지는 않았다. 청주시에는 1995년 8월 25일 293.0㎜, 2017년 7월 16일 290.2㎜ 비가 내린 적 있다.
청주시 흥덕구 오송 제2지하차도에서 발생한 참사는 결국 한국사회가 '과거에 경험했고 예상할 수 있는 기후'에 여전히 취약하며, '예상 밖 기후'엔 무방비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매년·매달 신기록 날씨…가뭄 겪던 댐이 3개월만에 '월류' 걱정
지금은 '이런 폭우는 전에 없었다'며 혀를 내두를지 몰라도 곧 폭우의 한 사례에 불과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 이번 장마철 시간당 강수량 최고치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서 11일 오후 2시 53분부터 3시 53분까지 기록된 76.5㎜인데, 신대방동엔 작년 8월 8일 중부지방 집중호우 때 시간당 141.5㎜ 비가 내린 바 있다.
서울 서초구 우면산에서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2021년 7월 26~28일) 시간당 강수량 최고치는 113.0㎜(관악구 남현동), 작년 태풍 힌남노가 상륙했을 때(2022년 9월 4~6일) 시간당 강수량 최고치는 111.0㎜(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였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극한호우, 나아가 극한기후의 시대가 시작했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이젠 '최고', '최저', '최대' 같은 단어를 빼고선 날씨를 전할 수 없을 정도다.
최근 수위가 만수위를 넘어 우려를 낳은 광주 식수원 동복댐은 지난 4월까지만 해도 저수율이 20%를 넘긴 게 화제가 될 정도로 물이 부족했다. 광주를 비롯한 남부지방에 가뭄이 1년 이상 지속했기 때문이었다.
정부의 '2022년 이상기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남부지방 기상가뭄(6개월 강수량이 평년 치보다 일정 수준 이상 적은 상황) 발생일은 227.3일로 1974년 이후 최장이었다.
남부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면서 정부는 한때 댐에서 '죽은 물'이라고 부르는 사수위 이하 물을 취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댐에서 물을 꺼내 쓸 수 없어 바닥까지 긁어 사용할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가뭄이 심했다는 의미다.
기후위기 올해부터 '고비'…하반기 '엘니뇨' 발생 확률 90%
강수량뿐 아니라 기온 등 모든 기상요소가 해마다 또 달마다 극값을 갈아치우고 있다. 이런 기록만 봐도 기후변화는 분명 진행 중이다.
집중호우 강도만 봐도 한국환경연구원은 최근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6차 평가보고서 바탕이 된 기후변화 시나리오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산업기술의 빠른 발전에 중점을 둬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하고 도시 위주 무분별한 개발이 확대될 경우'(SSP5-8.5)에 우리나라 연중 하루 최다강수량은 2049년까지 현재보다 8.5% 많은 146.2㎜, 이후 2079년까지 165.9㎜, 2080년부터 2099년까지 182.9㎜로 늘어나리라 전망했다.
기후변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예상보다 빠른 속도가 더 문제다.
극한호우 긴급재난문자는 지난해 8월 중부지방 집중호우를 계기로 '상식과 경험을 뛰어넘는 극단적 폭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도입돼 올해 6월 15일 수도권을 대상으로 시범 도입됐는데 바로 발송사례가 나왔다.
상식과 경험 밖 기후가 생각보다 이르게 나타날 수 있음을 방증하는 사례다.
세계적으로 올해부터가 기후위기 '고비'일 것으로 평가된다.
각국에서 기온 최고치가 잇따라 경신되는 등 전 지구적으로 이상고온 현상이 나타나는 가운데 세계기상기구(WMO)는 올해 하반기 엘니뇨가 발생할 확률을 90%, 사실상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열대 동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0.5도 높은 상태가 지속하는 엘니뇨는 지구 온도 상승을 부추긴다.
WMO는 지난 5월 올해부터 2027년까지 5년이 '역대 가장 더운 5년'이 되거나 5년 중 한해라도 역대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될 확률이 98%에 달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5년 사이 1년 이상 연평균 지구 표면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높을 확률도 66%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지구 표면온도가 일시적으로나마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이상 높아지는 이른바 '오버슈트'는 언젠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긴 했지만 이렇게 근시일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진 않았고 발생한 적 없기에 어떤 후과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기후변화 예상보다 빠른데 정부 대책은 '하세월'
이처럼 기후변화는 빠르게 진행 중인데 대응은 느리고 투자는 박하다.
극한호우 긴급재난문자만 해도 올해는 수도권에만 발송되고 전국 확대는 내년 5월 예정이다.
극한기후 대응을 위해선 기상청 예보관 증원이 필수인데 기상청 본부와 지방청에 예보관 1개조(4명)를 늘리려는 계획은 매년 '공무원을 늘릴 수 없다'라는 논리에 막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예보에 필수인 기상위성은 새로 발사해야 할 때가 됐는데 작년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하지 못해 기존 천리안위성 2A호가 수명 이상으로 운영돼야 하는 상황이다.
기상청은 천리안위성 2A호를 대체할 천리안위성 5호 개발사업 예타를 다시 받고자 절차를 진행 중으로 이번에 예타를 통과해 2025년부터 개발에 돌입한다고 하면 2031년에나 발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기후위기가 심화·가시화하고 있다면서 '국가 기후위기 적응 대책'을 보완해 내놨는데 기후변화 속도와 규모를 생각하면 '하세월 계획'이라는 평가가 많다.
예를 들어 농림축산식품부는 극한홍수에 대응해 저수지 치수능력을 확대하겠다면서 저수용량 500만t 이상 대규모 저수지 47곳만 2025년까지 사업을 완료하고 중·소규모 저수지(39곳)는 올해 하반기 예타를 거쳐 추진한다는 두루뭉술한 계획만 제시했다.
행정안전부는 철도시설에 적용되는 수방(水防) 기준을 도시철도(지하철)에도 적용하고 지자체가 건물 지하 침수 방지시설 설치를 지원하는 조례를 만들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하는 자연재해대책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했는데 환경부 소관 법률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어 아직 부처 협의가 진행 중이다.
환경부는 기후위기 취약계층 실태조사를 벌이겠다면서 내년 조사에 착수해 취약계층 보호 가이드라인을 2025년까지 만들겠다고 밝혔다. 더구나 지자체별 실태조사는 2027년까지 진행하기로 했다. 실태조사 근거를 담은 법(가칭 기후위기적응법)은 제정 절차가 시작하지도 않았다.
'100년에 한번 발생' 기준 흔들린다…기후영향평가 대상도 적어
현재 많은 기반시설이 강수량 등에 대해 '100년에 한 번 발생할 정도'에 맞춰 설계돼있다. 대표적으로 하천제방은 인구밀집지역과 가까운 경우 등에 '200~500년' 재현빈도를 적용하기도 하지만 '국가하천 100~200년, 지방하천 50~200년'이 표준이다. 항만 설계기준에는 외곽시설이 100년 재현빈도 파도에도 견디도록 규정하고 있다.
서울시는 작년 8월 집중호우를 계기로 시 방재성능목표 강우량을 시간당 100~110㎜로 올렸다. 이는 100년 재현 빈도 강우량에 해당한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심화하면서 '100년 내 최고치'에 대응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국지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극한기후 현상에 일률적 기준은 무용지물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주목받는 것이 작년 9월 도입된 '기후변화영향평가제'다.
각종 개발사업이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최소화할 방안을 모색하는 환경영향평가제처럼 '계획·개발사업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 계획과 사업이 기후변화에 받는 영향'을 평가하는 것이 기후변화영향평가제다.
이 제도를 통하면 시설별로 맞춤한 기후변화 적응책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적용 대상이 너무 적다는 점이다.
기후영향평가를 거쳐야 하는 정책·개발기본계획과 개발사업은 각각 52개와 41개에 불과하다. 도로는 12㎞ 이상 건설할 때, 산업단지는 50만㎡ 이상 조성할 때만 기후영향평가 대상이 된다. 수자원과 산지 개발사업은 행안부 재해영향평가 대상인데 기후영향평가 대상은 아니다.
올해 4월 기준 기후변화평가가 진행된 것은 2건에 불과하며 평가를 준비하는 것도 15건에 그쳤다.
"20년 전과 달라진 것 없는 재난대응…첨단기술로 자동화해야"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지금 같은 체계로는 기후변화와 극한기후에 대응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기후변화로 예측할 수 없는 호우가 잦아지면 기존 매뉴얼로는 모든 상황에 다 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며 "지자체, 행안부 공무원 중 전문인력에 권한을 더 많이 줘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공 교수는 "그런 보직이 기피부서이기 때문에 정말로 잘못된 결정을 내린 경우가 아니면 결과만 가지고 책임을 따져 묻지 않고 전문가로서 내린 판단을 존중하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송규 한국안전전문가협회 회장은 "지금의 안전관리 수준은 20년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라며 첨단기술에 기반한 재난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극한 기후변화 앞에서는 사람이 대응하면 이미 늦고, 첨단 과학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라며 "앞으로는 비를 예측하는 것만큼이나 비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예측하는 기술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강이 일정 수위를 넘어서고 도로가 몇 ㎝ 이상 침수되면 자동으로 진입을 차단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재난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산사태 전문가인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행안부와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산사태 취약지역은 2만여개뿐인데, 크기가 작은 산까지 포함하면 전국에 최소 100만여곳이 위험하다고 본다"라며 이들 지역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재난 복구보다 예방에 초점을 맞춘 과감한 예산 편성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공 교수는 "재해 복구에 예산 70~80%를 투입하고 예방과 대비에는 20~30%만 쓰고 있다"라며 "이런 보여주기식 재난정책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jylee2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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