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받아야 할 이메일 수백만통, 오타 하나 때문에 말리로 발송
말리 국가 도메인으로 잘못 보내
미군이 받아야 할 이메일 수백만 통이 서아프리카 말리로 발송되는 황당한 일이 지난 10여 년간 벌어졌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17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군부 쿠데타와 내전, 민간인 학살 등이 되풀이돼온 말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정정이 불안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는 친러시아 성향의 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미군의 인터넷상 도메인은 군(military)을 뜻하는 ‘mil’인데, 말리의 국가 도메인(ml)과 한눈에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기 때문이다. 메일을 보낼 때 발송자가 가운데 글자(i)를 빼먹는 오타를 내면 미군에게 보내려던 이메일이 대거 말리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잘못 발송된 이메일 중에는 제임스 매콘빌 미 육군참모총장과 수행원 20명의 5월 인도네시아 방문 일정 전체와 이들이 머물 자카르타 그랜드 하얏트 호텔의 방 번호 목록 같은 핵심 기밀 사항도 있었다. 외교 서한, 미군 기지 지도와 사진, 미 국방부 파일 교환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 미군 장병의 의료 정보나 소득 신고서 같은 민감한 정보도 포함됐다. 또 튀르키예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 단체의 동향을 담은 연방수사국(FBI) 수사관의 보고처럼 공개될 경우 국제적인 파장을 일으킬 만한 사안들도 적지 않앗다. 오발송 ‘사고’를 낸 발신자 중에는 미군과 계약을 맺은 여행사도 있었다.
이런 오발송 문제를 처음 파악한 사람은 2013년부터 말리의 국가 도메인을 관리해 온 네덜란드 사업가 요하네스 주어비어다. 그는 2014년부터 네덜란드 정부와 미국 국방부에 이 문제점을 알렸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주어비어는 “올해 상반기에만 말리로 잘못 발송된 미군 수신 이메일이 11만7000통에 이른다”며 “이 위험은 실존하는 것이고 미국의 적성 국가들이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확인한 것 중에는 호주 국방부가 미군에 보내려는 이메일이 8통 있었고, 그중에는 호주군이 운용 중인 F-35 전투기의 부식 문제 등에 관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사안을 단순 사고로 볼 수만은 없는 이유는 말리가 우크라이나 문제 등으로 미국과 대립 중인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기 때문이다. 202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말리의 군사정부는 2021년부터 러시아 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에 치안 유지를 의존했고, 3000명의 바그너 용병이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은 지난달 반란을 시도했던 바그너 그룹에 대한 해체 수순에 들어갔지만, 말리에 대한 관여는 지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말리 군부는 최근 국가 도메인을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미군 정보가 말리를 통해 러시아로 넘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파문이 커지자 국방부는 진화에 나섰다. 사브리나 싱 부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보도된 이메일 중에 국방부 공식 계정에서 발송된 것은 없다”며 “미 국방부나 미군의 공식 이메일에서 말리로 잘못 이메일을 보낼 경우 발송이 되지 않고 반송되는 시스템도 갖췄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만으로 군사기밀이 말리로 흘러가는 것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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