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유린당한 나라서 인권 피해 돕는 나라로

최경운 기자 2023. 7. 19.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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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우크라 여성·어린이 지원”
방공호에서 미술 수업받는 우크라 아이들 -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떠나온 아이들이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비우의 방공호 안에서 미술 수업을 받고 있다. 이 수업은 전쟁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우크라이나 민속 미술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EPA 연합뉴스

“아이들 얼굴이 계속 아른거린다.”

지난 15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귀국해서도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답답해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아이들은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국립아동병원에서 만난 어린이들이다. 이곳에선 러시아군에 납치돼 러시아로 끌려갔다가 제3국을 통해 귀환한 어린이 380여 명이 치료받고 있다. 이 아이들은 러시아로 끌려가 체제 선전용 도구로 활용됐고, 여성 어린이들은 성적 학대도 당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이 어린이들을 안아주고 무릎에 앉혀놓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18일 “대통령이 떠날 때가 됐는데도 아이들이 무릎에 계속 앉아있으려는 걸 보고 ‘전쟁 트라우마 때문 아닌가’ 안타까움이 컸던 것 같다”고 했다.

윤 대통령이 키이우에서 정상회담을 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아동 심리 치료 관련 재원과 프로그램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어린이들에 대한 인권 침해를 직접 목격한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아동센터에서 ‘모자(母子) 보건’ 지원 필요성도 강조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동과 여성”이라며 “아버지를 잃은 한부모 가정 등 아동·여성을 지원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외교부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아동·여성 지원 방안 구체화 작업에 들어갔다. 윤 대통령 방문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계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가 주도하는 ‘사마리안 퍼스’ 등과 연대해 우크라이나 아동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故)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인 프랭클린 그레이엄 목사는 우크라이나를 방문해 전쟁고아를 돌보며 의료캠프를 설치해 운영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귀국 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저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완전히 자유를 되찾는 날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유와 인권을 사랑하는 우리 국민께서도 함께 지지해주시고 동참해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73년 전 북한의 침공을 받고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길 뻔한 우리는, 유엔군이 즉각 달려와 준 덕분에 우리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가장 힘들 때 국제사회가 내밀어 준 손길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잘 아는 우리 국민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에 기꺼이 찾아가 책임 있게 기여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실 것이라고 믿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한 아이가 폴란드 국경 검문소의 피란민 임시 수용 시설 앞에서 과자를 먹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 어린이와 여성이 겪는 인권 침해는 참혹하다. 러시아로 끌려간 우크라이나 어린이 2만여 명 중 상당수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국제 아동 구호 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은 전쟁 1년 경과 보고서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매일 어린이 4명이 죽거나 다치는 것으로 파악됐는데 실제 어린이 사상자 수는 훨씬 더 많을 수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여성도 전쟁 범죄에 노출돼 있다. 우크라이나 검찰청이 최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작년 2월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범죄는 총 7만558건으로 집계됐다. 지금도 러시아군이 점령지에서 여성과 아동을 성폭행하거나 유괴하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 3월 전쟁 중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러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혐의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며 우크라이나 편에 섰다.

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아동·여성 지원을 복지를 넘어 인권 문제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취임 후 추진하는 자유민주주의 국제 연대의 핵심 가치도 인권이다. 더구나 한국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본군 위안부, 전쟁고아 같은 최악의 여성·아동 인권 유린을 겪은 피해국이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은 강대국의 침략에 따른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공감할 수 있는 나라”라면서 “세계 중추국가를 지향하는 한국이 우크라이나 인권 문제 해결에 나서면 세계 많은 나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쟁 범죄의 피해국이 적극적 연대와 지원을 통해 과거사의 아픔을 승화할 수 있는 선례가 될 수도 있다. 정서용 고려대 교수는 “한국은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기적적인 경험을 가진 나라로서 전쟁으로 위험에 놓인 여성·아동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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