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살아 있다는 비참한 안도감
2003년 2월 18일, 나는 곧 입학하게 될 고등학교에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잠깐의 휴식과 일탈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학교에서는 매일 자습을 시켰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얼굴도 이름도 잘 모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서먹하게 문제집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 정적을 깨고 누군가 외쳤다. “지하철에 불났대!” 대구 지하철 참사는 그 한마디로 가장 먼저 기억된다. 나는 지하철역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사망자 192명 가운데 92명이 인근 주민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절망적인 슬픔과 분노 사이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사고 장소는 나도 자주 다니던 지하철역이었다. 학교에서 자습을 시키지 않았다면 그곳에 있었을 수도 있다. 뉴스에서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기적적으로 생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졌지만,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로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안도감은 사고만큼이나 비참했다.
그사이 참사로 불릴 만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도 함께 반복되었다. 이러한 안도감의 실체는 내가 생과 사의 경계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일 것이다. 이는 언젠가 TV로 보는 사고가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실감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에게 이러한 죽음은 너무 쉽게 남 일이 되는 것 같다. 이번 폭우로 인한 사망 사고도 마찬가지다. 애도와 공감은 어느새 오간 데 없고 편의적인 진영 논리만 가득하다. 심지어 한 국회의원은 참사를 부적절하게 빗대어 질타를 받기도 했다.
물론 사고를 근본적으로 없애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라는 덧없는 말만큼은 없애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죽음 자체에 집중하며 애도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 매년 9·11 테러를 추모하며 방비 태세를 점검하는 것은 본받을 사례라 할 수 있다. 죽음을 기억한 이후에야 죽음을 막을 수 있다는 각오다.
폭우가 또다시 이어질 거라 한다. 살아남아 안도하는 비참함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애석한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