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역적이 된 백선엽, 영웅이 된 호로비츠
다양한 분야에서 위인 발굴 나서
차이콥스키, 호로비츠를 세계에 자랑
우리는 민족의 영웅을 친일로 내몰아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방문한 우크라이나는 우리와 비슷한 민족적 고난을 숱하게 겪었다. 나라 없던 시간은 우리보다 훨씬 길다. 러시아 제국 치하에선 우크라이나 말과 글을 금지당했다. 소련의 일부로 살던 시절에도 무장투쟁을 불사했다. 숱한 목숨을 독립의 제단에 바쳤다.
1991년 비로소 자기 나라를 가졌다. 이후 독립과 건국에 기여한 이들을 찾아내고 기렸다. 여기까지는 우리와 비슷하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가 영웅으로 세운 이 중엔 ‘이런 사람도?’라는 생각이 드는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이가 20세기 불세출의 피아니스트라고 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다. 호로비츠는 1903년 키이우에서 러시아 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했다. 스무 살 넘어서는 벌이가 좋은 서유럽으로 건너갔고, 이후엔 평생 미국인으로 살았다. 고국을 떠난 지 61년 만인 1986년 귀국했는데 고향이 아닌 모스크바였다. 유튜브엔 그가 피아노곡을 연주할 때 모스크바 청중이 감동해 눈물 흘리는 장면이 돌아다닌다. 우리라면 식민지 조선인이 서울 아닌 도쿄에서 귀국 연주회를 하고 박수 받았다고 손가락질당했을 장면이다.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인생사를 제국주의 시대에 태어나 겪은 음영으로 여겼다. 오히려 그를 우크라이나의 자랑스러운 음악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독립 4년 뒤인 1995년 그를 기리는 호로비츠 콩쿠르를 창설했다. 작년 러시아가 침공하자 호로비츠 콩쿠르는 새로운 의미를 더했다. 러시아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국민적 의지를 담았다. 콩쿠르 안전을 위협받았지만 중단하지 않고 스위스 제네바로 장소를 옮겨 지난 4월 무사히 대회를 마쳤다.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아버지가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러시아는 대작곡가의 이런 개인사가 눈길 끄는 것을 싫어했지만, 우크라이나는 차이콥스키가 평생 작곡한 80곡 중 30곡을 우크라이나에서 썼다는 사실을 부각하고, 특히 그의 각별했던 키이우 사랑 스토리도 발굴했다. 최고 음악 교육기관인 키이우 음악원도 국립 차이콥스키 음악원으로 개칭했다. 이런 배경엔 독립 이후 심혈을 기울인 ‘우크라이나 유산 되찾기’ 운동이 있었다. 러시아 소설가로만 알려졌던 고골도 이 운동을 통해 우크리아나 문화를 빛낸 인물로 재정의했다. 같은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트로츠키는 배제됐다. 그가 소련 국방장관이 되어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우크라이나어를 “러시아어의 사투리일 뿐”이라고 비하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부가 백선엽 장군의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기록에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문구 삭제를 추진한다. 당연한 조치다. 백선엽 장군이 나라를 팔아먹었나. 나라를 일제에 바친 이는 조선의 왕 고종이다. 백선엽 장군이 태어났을 때 우리 조상은 호로비츠나 고골처럼 나라가 없었다. 일부는 그가 20대 초반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것을 친일이라 비난한다. 하지만 소속만 돼 있었을 뿐 동족과 싸우지 않았다. 만주 지역 독립군은 청년 백선엽이 특설대에 배속되기 전에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민족 행위의 범위를 일제 패망 이후 현대사까지 아우르면 백선엽 장군은 민족의 반역자가 아니라 영웅이다. 6·25를 일으켜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눈 이들이야말로 민족 반역자다. 백선엽 장군은 거기서 나라를 구했으니 당연히 민족 영웅이다. 우크라이나는 무장 독립지사들도, 문화적 역량을 보여준 예술인들도 모두 자국의 자랑으로 아우른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선 나라를 지킨 전쟁 영웅도, 안익태와 홍난파 같은 자랑스러운 예술인도 친일 굴레를 씌워 모욕한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재건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다만, 역사를 품는 그들의 자세는 우리가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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