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 가치 공동체의 명암
이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정상회의에 아·태지역의 한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초대되었다. 이를 두고 두 지역은 이미 하나의 가치 공동체에 속한다는 견해와 이는 나토의 아·태지역으로의 확장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집단적인 상호방위 체제인 나토와 유럽의 정치와 경제통합을 목적으로 한 유럽연합(EU)은 내용상으로 거의 같은 가치(평화, 민주주의, 자유, 법치)를 공유하는 공동체다.
그러나 나토가 1999년 3월, 당시 나토 가맹국의 영토 밖이었던 코소보의 분쟁에 유엔의 위임 없이 ‘인도주의적인 개입’이란 이름으로 무력개입을 하자 많은 논쟁을 낳았다. ‘우리의 가치’를 짓밟는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를 종식한다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런 집단행동이 과연 국제법적으로 정당한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이런 논리를 따른다면 나토 가맹국이 아닌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종속시키기 위해 나토가 직접 군사적인 개입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나토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최신무기를 지속해서 지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나 이의 일정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나토 가맹국의 어떤 나라도 현재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도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달리 해석된다.
나토의 코소보 분쟁 개입을 적극 옹호했으며, 1970년대 중반에 프랑스 지성계를 풍미했던 ‘신철학’의 기수 중 한 사람이었던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푸틴의 유라시아 재건이라는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드르 두긴 사이에 2019년 9월 암스테르담에서 공개 논쟁이 있었다. 두 철학자는 토마스 만의 <마(魔)의 산(山)>에 등장하는 인물인 인문주의자며 합리주의자인 제템브리니와 반자본주의적인 근본주의자 나프타에 각각 비유되기도 했다. 이 논쟁에서 레비는 자유와 인권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두긴의 철학이 내건 ‘혁명적인 보수주의’도 결국 허무주의며, 파시즘이나 나치즘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 두긴은 서방 세계는 자신의 역사적인 경험인 자본주의, 시장경제, 인권, 개인주의, 향락주의를 보편주의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전파한다고 응수했다.
서구 보편주의 싸고 끊임없는 논쟁
이 논쟁에 얽힌 현실 정치의 맥락을 잠깐 비켜나서 본다면 이 논쟁도 결국 보편이나 보편주의는 항상 옳은지를 묻는, ‘영원 철학’의 오래된 주제를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질문은 또 서구가 식민지의 확장 과정에서 축적한 비서구 사회에 대한 지식체계도 문제 삼았다. 몽매하고 낙후한 사회를 계몽할 수 있는 서구문명이 지니는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 결국 식민주의와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논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적 세계해석을 비판하는 상대주의 철학이나 문화 인류학의 반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본적인 비판은 1960년대에 들어서 제3세계의 민족해방 투쟁과 맞물리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는 식민주의자와 인종주의자가 표방한 보편주의 프레임에 따라 열등하고 야만적이라고 굴레 씌워진 자들의 정체성 확인과 자기 긍정,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의 결과이기도 했다.
“식민화된 자들이 식민지 세계에 대한 물음은 결코 관점들 사이에 일어나는 합리적인 충돌이 아니다. 이는 또한 보편적인 것에 대한 논증도 아니다. 오로지 절대적으로 제기되는 특수의 원초적인 주장일 뿐이다”라고 알제리 민족해방 투쟁의 이론과 실천에 큰 발자취를 남겼던 프란츠 파농(1925~1961)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에서 강조했다. 한마디로, 강요하는 보편에 대해서 이에 저항하는 특수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이런 탈식민주의 흐름은 그 후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다시 분명하게 표출되었다. “여러 가지로 낙후하고, 비정상적이고, 비문명적이고 퇴화하였다고 여겨지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생물학적인 결정론과 도덕·정치적인 가르침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주 아랍인들을 본다. 그래서 이들을 거의 우범자나 정신병자, 여성 또는 가난한 자와 비슷하다고 여긴다.”
이렇게 식민주의자와 인종주의자의 눈으로 규정되었던 세계 일부가 겨우 독립을 달성했거나, 아니면 여전히 민족해방 투쟁의 도상에 있었던 1948년 12월10일, 유엔에서 당시 58개 가맹국 가운데 48개국의 찬성으로 ‘세계인권선언’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 선언의 정식 명칭은 ‘인권의 보편적 선언’이다. 동서냉전이 이미 시작된 상황이라 이 선언의 초안을 둘러싸고 정치적인 시민권을 강조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사회경제적 권리를 강조한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사이에 논쟁도 많았다. ‘보편적’이라고 했지만, 당시 유엔의 가맹국이 아니었던 이른바 ‘주변부’에 속했던 많은 신생국의 목소리는 담겨 있지 않았다. 이를 둘러싼 논쟁은 1990년대에 다시 지펴졌다. 1990년 ‘카이로 이슬람 인권 선언’과 1990년대 중반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와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가 제기했던 ‘아시아적 가치’가 촉매 역할을 했다.
개인주의에 기초한 서구의 가치만이 보편적일 수 없으며 집단주의에 기본을 둔 가치체계도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요 논지였다. 이 배경에는 석유 파동으로 말미암은 미국과 유럽의 경기 침체와 사회적 갈등과 대비시켜 긍정적으로 평가된 이른바 ‘일본 모델’, 그리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으로 묘사된 동아시아의 경제성장이 있었다.
우리의 가치에 연대와 평화도 귀중
게다가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막강해진 중국의 위상도 이런 분위기를 더했다. 그러나 이런 논의도 1997년 7월, 아시아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점차 시들해졌고 아시아적 가치와 경제성장 사이의 인과 관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평가가 뒤따랐다.
2020년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적 결집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대만 등이 ‘문화적 이완성’이 강한 서구나 남미의 국가에 비해서 코로나19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문화적인 긴장과 갈등에 내재하는 가치에 관한 이런 논쟁은 분단으로 말미암은 심한 정치적 이념 갈등 때문에 뒷전으로 밀렸다. 가치 논의의 출발점은 대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와 안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매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와 함께 비서구권에서 일본에 이어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는 자긍심은 과거 일본 메이지유신 시기의 ‘탈아입구(脫亞入歐)’와 비슷한 정서도 낳았다. ‘우크라이나 평화 연대 이니셔티브’를 이야기할 정도로 우리도 이제 나토라는 서방세계의 중요한 가치 공동체의 일원이 됐다고 느끼는 분위기가 그렇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가치 동맹’이나 ‘가치 외교’는 윤석열 정부의 키워드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이 주로 국내 정치를 겨냥한다면 후자는 국제관계에서 지켜야 할 원칙처럼 보인다. 가치 공동체를 이야기하면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를 핵심으로 하나가 된 서방세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가치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이지만 정치·문화적 차이에서 생긴, 가치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작지 않다. 개인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미국보다는 사회 성원의 안전을 같이 생각하는 유럽, 또 우파 민족주의 세력이 집권한 헝가리나 폴란드가 유럽연합의 가치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도 가치 공동체의 실상은 꽤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까닭에 보편적인 이념을 전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가치 공동체를 차라리 ‘이익 공동체’나 ‘법률 공동체’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실제와 부합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우리가 공유할 가치에는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대도 있고 평화도 있다. 그래서 반지성주의와의 싸움 대신에 사회적 연대, 가치 외교 대신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외교가 지금 우리에게는 귀중한 가치가 아닌가 하고 묻게 된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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