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프루던스와 국가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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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 일본에서 경험한 일이다.
하지만 예견과 원려를 할 줄 아는 국가가 미리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런 시행착오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프루던스는 국가역량의 요체다.
이태원 참사를 접했을 때 국가의 프루던스 역량을 생각하며 가슴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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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 일본에서 경험한 일이다. 도쿄의 어느 대학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었다. 갑자기 비상방송이 나왔다. "지진발생, 지진발생…진도는 4"라는 소리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 4, 3, 2, 1." 곧이어 시속 10㎞로 달리는 자동차가 벽에 부딪히는 듯한 지진충격이 몸에 전해졌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대조되는 경험을 했다. 경기도 부모님 댁에 있었는데 갑자기 아파트가 흔들렸다. 부모님은 못 느끼셨다지만 나는 분명히 느꼈다. 급히 재난속보를 보려고 공영방송을 켰다. 하지만 공영방송 어디에도 지진속보는 없었다. 드라마와 예능방송만 평화롭게 나오고 있었다. 다음, 네이버 같은 포털도 감감무소식이었다가 3, 4분쯤 지나서야 지진속보가 나오기 시작했다. 포항, 경주 쪽에 큰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영국에서 경험한 일기예보 이야기다. 학업을 위해 영국에 몇 년 살았는데 영국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일기예보였다. 영국은 해양성 기후라 그런지 날씨가 꽤 변화무쌍한데도 BBC 일기예보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나중에 귀국해서 일기예보를 보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정확하고 또 정확히 예보하기보다 가급적 '안 좋은 예보'를 내놓는 경향이 강한 듯했다. '좋은 예보'를 내놨다가 틀리는 경우 받을 여론의 질타가 두려워서인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입법부, 행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는 예견(豫見) 하고 원려(遠慮)하는 조직이다. 국가의 도움 없이도 시민사회는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해법을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예견과 원려를 할 줄 아는 국가가 미리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런 시행착오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길에 비유해보자. 어느 대학에서 새 캠퍼스를 만들었다. 나무도 심고 잔디밭도 조성했다. 그런데 바쁜 학생들이 그 잔디밭을 그냥 놔두고 빙 둘러 다닐 리 없다. 아마 1, 2년도 안 지나 잔디밭 위로 지름길 하나가 자리를 굳힐 것이다. 시민사회는 시간이 흐르면 편한 길을 찾아낸다. 영국 철학자 로크는 시민사회는 시간은 좀 걸리지만 스스로 관습법을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국가가 상황을 예견, 원려해 법을 미리 만들어준다면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대학 당국이나 조경회사가 처음부터 지름길을 만들어놨더라면 시행착오 1, 2년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고 잔디훼손도 줄였을 것이다.
서양의 고전 정치학에서는 이러한 예견, 원려를 '프로비데레'(providere, 앞을 내다보다)라고 하고 여기에서 영어단어 '프루던스'(prudence)가 나왔다. 프루던스는 국가역량의 요체다. 정확한 달력은 농업 수확량을 올리고 정확한 일기예보는 재난을 줄인다. 국내외 정세를 예견, 원려해 평화를 지키고 국내외 경제를 예견, 원려해 번영을 가져온다. 한국의 프루던스 역량은 과연 어느 정도 될까. 프루던스의 힘을 키우는 교육은 있는지. 프루던스의 역량을 가진 인재와 조직은 만들고 있는지. 이태원 참사를 접했을 때 국가의 프루던스 역량을 생각하며 가슴을 쳤다. 올해도 재난은 우리의 빈곤한 프루던스를 조롱하며 어김없이 발생하고 있다.
김동규 (국제시사문예지 PAD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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