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거센 장맛비였다. ‘극강 호우’라고 했다.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동안 긴급재난문자가 들어왔다. 굵은 빗방울은 초목과 지붕을 적시고, 금세 작은 내와 강, 물웅덩이와 호수를 넘치게 했다. 삽시간에 불어난 물은 성난 기세로 제방을 무너뜨려 저지대를 침수시키고, 집과 가축과 인간 목숨마저 쓸어갔다. 산사태로 주택이 매몰되고, 지방도로가 끊기고, 항공편과 기차 편이 취소됐다는 임시 편성 호우 특보에 귀를 쫑긋 세웠다.
다들 물의 무서움에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이 사태를 주시했을 테다. 장맛비의 위력을 이토록 통제 불가능할 만큼 키운 것은 기후 위기일까? 온 나라가 물난리 소동을 치르는데 천진한 고양이 두 마리는 소파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잔다. 집안이 바다에 떠 있는 섬 같다. 장맛비는 이제 그만 내려도 좋으련만!
습관의 노예가 되면 죽은 사람
작가 마르탱 파주는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독서를 하고, 영화관에 가고,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라고 썼다. 비가 사람들 몰래 꾸미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가 보다. 비는 오래된 우정을 시험하고, 일요일의 피크닉을 망치며, 우리를 우연의 인연으로 이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은/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생각나면 들러봐요. 조그만 길모퉁이 찻집/ 아직도 흘러나오는 노래는 옛 향기겠지요.” (산울림, ‘창문 넘어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비는 추억 창고의 문을 열게 한다. 그 창고엔 무엇이 남아 있을까? 파꽃과 국수 가게, 아이들 키를 재던 눈금이 벽면에 남은 옛집, 낡은 사진들, 길모퉁이 찻집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엔 시립도서관에서 책이나 읽던 내게 불쑥 쪽지를 건네고 총총히 사라진 소녀, 음악감상실 ‘필하모니’에서 듣던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 2악장, 제 손목시계를 풀어 막걸리를 사며 들려준 물리학도의 슬픈 첫사랑 사연, 가스통 바슐라르의 매혹적인 문장들, 사과나무 칠십 그루로 살림을 꾸리던 북유럽 시인 올라브 H 하우게의 정신병, 청년 의사이자 시인이던 마종기가 내놓은 아름다운 ‘연가’ 9번과 13번도 옛 향기와 함께 남아 있겠지.
스무 살에 맛본 비는 달콤하지도 쓰지도 않았다. 빗방울 하나하나는 최소주의로 쪼개진 작은 입술들이다. 빗방울들은 파초, 돌, 모란, 연못, 댓잎에 츱츱츱 소리를 내며 키스를 한다. 바람은 연인이 쓴 우산을 뒤집고, 비는 새 옷을 망쳐버린다. 강철의 비는 슬픔을 단련시킨다. 벗들이 비를 핑계 삼아 모여서 술을 마실 때 비는 술에 술맛을 더하고, 실연에는 슬픔 몇 그램을 더한다.
비는 레몬처럼 즙을 내어 우리의 술잔에 멜랑콜리 한 방울씩을 더한다. 비 오는 날 술은 여럿이 마시면 여럿이 취하고, 혼자 마셔도 여럿이 취한다. 우리는 비와 세월에 취해 노래하는 비의 벗들이다. 그 시절 우리가 목청 높여 부르던 노래는 다 어디로 갔을까?
빗속에 갇혀 지내는 동안 브라질 시인 마사 메데이로스(1961~)의 시구를 떠올린다.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 만사를 귀찮아하며 습관의 노예로 대충 살아가는 이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이다. 메데이로스에 따르면 “습관의 노예가 된 사람”,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는 사람”, “꿈을 따르기 위해 확실성을 불확실성으로 바꾸지 않는 사람”,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합리적인 조언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나쁜 운과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은 이미 죽어가는 이들이다.
서서히 죽는 것에 저항하지 않으면 삶의 경이와 아름다움에도 무감각해진다. 아름다운 것에 무덤덤하고, 심장이 뛰지 않는 사람은 감정의 고갈과 행복의 부재 속에서 무의미한 타성에 젖은 채 똑같은 날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다. 타성을 벗고 자기 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여행하고, 책을 읽고, 음악에 귀를 기울일 시간을 내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삶이다.
장마철이면 외삼촌들은 빗속을 뚫고 들판으로 나가 먼 강에서 가까운 내로 거슬러 올라오는 메기와 잉어를 그물로 건져오곤 했다. 외삼촌들은 어른 팔뚝보다 커다란 메기와 잉어들을 자랑스럽게 시골 마당에 풀어놨다. 세상에 저렇게 큰 물고기들이라니!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마당에서 펄떡거리는 메기와 잉어들을 보며 경탄을 했다. 아, 세상은 온통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장소구나!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으로
나는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먼 고장을 그리워하는 아이였다.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웃음을 만들어주던 장마철 볼거리에 심장이 뛰었고, 그런 날 밤엔 펄떡이는 잉어를 품어 안는 꿈을 꿨다. 잉어를 품는 꿈을 꾸던 소년은 자라서 강에 몸을 담그고 쏘가리나 동자개(빠가사리)를 낚는 낚시꾼이 되지 않고 공중의 언어를 낚는 시인이 됐다.
장화를 신고 빗물 괸 웅덩이를 찰박거릴 때 물방울은 사방으로 튀었다. 집에 돌아가면 바짓자락을 적셨다고 어른들께 야단을 맞을 것이다. 그 어린 시절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활동을 제약하고 기분을 가라앉게 만드는 비보다 햇빛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나는 건축 공사장을 엉망으로 만들고, 중요한 야외 행사를 취소시키며, 속절없이 수재민을 낳는 장맛비가 얼른 그치기를 기다린다.
장맛비 그치면 청량한 하늘 아래 녹음은 우거지고 매미들은 맹렬하게 울어댈 것이다. 나는 꽃 핀 여름의 배롱나무를 지나서 카페에 가고 산책에 나설 때마다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의 반대편에 서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첫 봉오리를 터뜨린 모란과 작약꽃 앞에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비천한 운명에 기쁨과 웃음으로 맞서며 타인의 불행과 고통을 연민하고, 평범한 사물의 인내심에 경탄하며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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