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 가격 한때 급등…우크라 곡물 의존도 높은 빈곤국 식량위기 우려
흑해로 폐쇄 땐 수송비 늘어
가격 인플레·식량 안보 영향
‘세계식량계획’ 활동 축소돼
러, 무기화 가능성도 경계를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 연장을 거부한 후 미국 시카고상품선물거래소(CBOT)에서 밀 선물 가격이 한때 6%가량 급등하는 등 곡물 가격이 꿈틀거리고 있다. 단기적 영향은 제한적이겠지만 빈곤국에 대한 인도주의적 식량 지원에 타격을 주고 글로벌 차원의 식량 수급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17일(현지시간) CBOT에서 밀 선물 가격은 한때 6%가량 급등하며 2주 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옥수수, 콩 등 다른 곡물들도 동반 상승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글로벌 식량 가격이 지난해처럼 고공행진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이날 밀 선물 가격은 부셸당 6.5달러까지 떨어지며 금세 안정세를 되찾았다. 미국 금융서비스기업 스톤엑스의 원자재 담당 책임자 알란 서더만은 뉴욕타임스(NYT)에 “러시아가 값싼 밀을 시장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에 당장 밀이 동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반구의 밀 수확기가 시작된 것도 당장의 가격 인상 압력을 끌어내리는 요인이다. 프랑스 곡물 자문회사 아그리텔의 애널리스트 고티에 르몰가는 AFP통신에 “수확기가 끝나야 상황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가격 상승 압력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네덜란드 라보방크 농업 원자재 시장 책임자인 카를로스 메라는 CNBC에 “흑해협정이 중단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이제 곡물 대부분을 육로와 다뉴브강을 이용해 수출해야 하는데, 이는 수송비용을 늘리고 우크라이나 농부들의 수익을 줄인다”면서 “이렇게 되면 다음 시즌 곡물 파종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수요에 압력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말했다. 농업 싱크탱크 팜파운데이션의 올리아 타이입 셰리프는 AFP통신에 “흑해 통로가 폐쇄되는 기간이 길어지면 식품 가격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있고 식품 안보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흑해곡물협정 중단의 가장 큰 피해자는 우크라이나산 곡물 의존도가 높은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지역의 빈곤국들이다. 유엔에 따르면 흑해곡물협정을 통해 수출된 곡물의 57%가 빈곤국을 포함한 개도국에 전달됐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지난 1년 동안 흑해곡물협정을 통해 에티오피아(26만30000t), 예멘(15만1000t), 아프가니스탄(13만t), 수단(3만t) 등을 포함한 중동·아프리카 국가들에 72만5200t의 우크라이나산 곡물을 지원해왔다.
로이터통신은 “WFP가 현재도 자금 부족으로 일부 국가에서 활동을 축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WFP는 곡물협정 중단으로 앞으로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우크라이나 이외의 다른 국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지적했다. WFP는 지난달 비상사태가 겹치면서 최근 70년간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기아와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소말리아 모가디슈의 난민촌에서 다섯 아이를 키우는 할리마 후세인은 흑해곡물협정이 중단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17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로이터통신에 말했다. 그는 “구호단체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막막함을 토로했다.
소말리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밀 가격이 2배로 치솟아 위기를 겪었다가 지난해 7월 곡물협정이 체결된 후 가격이 4분의 1가량 떨어져 그나마 숨통이 트이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날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 종료를 선언하면서 소말리아 상인과 제빵사, 난민들의 두려움은 다시 커지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일부 모가디슈 상인들은 밀 50㎏당 가격이 현재 20달러에서 30달러까지 폭등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러시아가 밀을 무기화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스위스 장크트갈렌 대학교 시몬 이브넷 교수는 CNBC에 “앞으로 문제는 러시아가 밀 수출을 무기화하느냐 여부”라면서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밀에 세금을 붙이는 등 가격을 올릴 가능성을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현재 한 해 4500만t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밀 생산국이다.
러시아가 아직 협정을 탈퇴하진 않은 만큼 중국이 러시아를 설득하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중국은 흑해곡물협정을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수출된 곡물 796만t을 사들인 최대 수입국이기도 하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중국은 최근 몇년간 우크라이나에 대한 곡물 의존도를 높여왔다”며 “서방 관리들은 러시아의 우방인 중국이 러시아를 협상 테이블에 다시 불러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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