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위기의 흑해곡물협정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의 연장을 17일(현지시간) 거부하면서 세계 식량 위기가 다시 고조되고 있다. 전쟁 와중에도 ‘세계의 빵바구니’ 우크라이나가 연간 3300만t의 곡물을 수출해온 바닷길이 막힌 것이다. 러시아는 약속과 달리 자국의 농산물 수출이 보장되지 않았다며 네 번째인 연장에 어깃장을 놨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폭등한 국제 곡물가를 잡으려고 7월 튀르키예와 유엔이 중재한 협정이 파기될 판이다.
당장 개발도상국이 걱정이다. “(흑해곡물협정은) 가장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놓인 79개국 3억4900만명에게 생명줄”이라고 국제구조위원회(IRC)는 본다. 지난 1년간 밀, 옥수수, 콩을 비롯한 곡물 수출량 절반이 개도국행이었다. 유엔 세계식량농업기구(FAO)가 소말리아를 비롯한 분쟁국에 지원해온 농산물 규모 2위가 우크라이나산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동아프리카가 40년 만에 최악의 가뭄에 직면한 상황에서 곡물협정이 이대로 깨진다면 취약계층 수억명이 굶주림에 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적대로 “기아의 무기화”나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초강수는 서방의 제재 완화를 노린 것이다. 농산물 수출이 어렵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퇴출당한 스위프트(국제금융결제망) 재가입을 요구하고 있다. 서방으로선 수용하기 쉽지 않다. 이번 협정 파기로 서방 군대와 러시아군의 직접 충돌 우려가 커졌다는 진단도 나온다. 나토(NATO)군이 인도주의적 구호를 목적으로 곡물선을 호위하고, 러시아 흑해함대가 이에 맞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농부들은 전쟁 와중에도 지뢰밭이 된 경작지를 부지런히 복구해 씨앗을 뿌리고 수확해왔다. 덕분에 세계의 가난한 이들은 끼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수출길이 막힌다면 곡물은 창고에서 썩고, 사람들은 기아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아무리 국익이 최우선이라지만 이런 반인륜적인 교섭 지렛대를 꼭 써야만 할까. 러시아는 사태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하루속히 협정을 연장해야 한다.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최민영 논설위원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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