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수 칼럼] 2년째 물난리, 국가는 또 없었다

이기수 기자 2023. 7.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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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호우에 침수된 충북 청주시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에서 지난 16일 119구조대원들이 실종자 수색을 하고 있다. 성동훈 기자

“세숫대야로 들이붓네.” 물난리 난 16일, 부여 고향 친지는 전화 너머로 “비가 무섭다”고 했다. 예부터 하늘 뚫린 큰비를 세숫대야로 비유했었다. 친지는 그땐 한나절이고, 지금은 온종일 퍼붓는다고 했다. 백마강 벌판의 논·축사·비닐하우스는 다 흙탕물에 잠겼다고 했다. 나흘간 600㎜ 쏟아졌다니 눈에 선하다. 부여 비는 많이 온 축이다. 아니어도, 이 장맛비는 셌다. 산사태가 노부부·납골당·이주노동자를 덮쳤다. 오송 지하차도에선 수몰 참사가 또 벌어졌다. 50명이 세상 뜨고, 시·군·구 110곳에 이재민 나고, 여기저기 인재라니, 수해 민심은 펄펄 끓는다.

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트위터엔 ‘#무정부 상태’ 해시태그가 번지고 있다. 오송 참사와 예천 산사태가 터진 15일 윤석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행 열차에,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폴란드에,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미국에 있었다. 이태원 참사로 탄핵소추된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직무 정지됐다. 공교롭다. 나라 밖이고, 공석이라서 무정부 상태인가. 댓글은 아니란다. 해시태그는 세 뉴스가 전해진 16일 밤 불붙었다. 대통령 우크라이나행은 엠바고(보도시점 유예)가 풀렸고, 김건희 여사의 순방 중 ‘명품쇼핑’이 전해졌고, “대통령이 당장 서울로 뛰어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는 대통령실 고위인사 말이 나왔다. 오송·예천의 악전고투와 나라 밖 세 뉴스가 교차한 그 순간, ‘#무정부’ 폭풍이 일어났다.

처음이 아니어서일 게다. 지난해 8월8일 저녁, 대통령은 침수된 서울 아파트를 보며 퇴근했다. 115년 만의 폭우 피해가 줄잇는 밤에도 서초동 자택에 머물렀다. 재택근무 시비가 인 다음날, 대통령은 신림동 반지하 주택을 찾았다. “어떻게 미리 대피가 안 됐나 모르겠네?” 발달장애 가족 3명이 물 차오른 밤 휴대폰으로 살려달라며 발버둥치다 수몰된 뉴스도 몰랐고, 영화 <기생충>의 반지하 폭우 장면도 잊은 물음이었다. ‘물난리에 대통령이 안 보였다’는 혹평 탓일까. 우크라이나행에도 그 기시감이 따라붙는다. 출국 때 ‘호우에 과도하게 선제적 조치 하라’ 해놓고, 대통령은 어긴 격이다. 수해·태풍에 정상외교를 미룬 이탈리아·일본·캐나다 총리와 오래도록 비견될 게다.

‘#무정부’엔 망언도 끝없다. 대통령이 서울 가도 상황 못 바꾼다니 참모가 할 소린가. 1년 전 “비 온다고 대통령은 퇴근 안 하냐”(강승규 시민사회수석)며 뭇매 맞고 달라진 게 없다. “대통령 계신 곳이 집무실”이란 박대출 여당 정책위의장 아부는 세월호 때 김기춘 비서실장이, 작년 8월 강 수석도 했다. 단 한분만 ‘무오류·무책임’의 성역으로 만들려는 걸 테다. 요설에 싸인 권력자는 부평초처럼 붕 떠가게 된다. 경북이 난린데 골프 친 홍준표 대구시장은 “트집 잡지 말라” 싸우다 매를 번다. 뽑혔든 임명됐든 이 나라 공복들이 이렇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헌법(34조) 밖에 살며 다 권력에 취했다.

사납고 긴 비가 국토와 만물을 할퀴었다. 그뿐인가. 사람 맘엔 상처를 남겼다. 큰비 오면, 달리던 지하차도나 차 빼러 간 주차장에서 엉겁결에 죽는 나라가 됐다. 그 당혹감과 한을 가늠하기조차 두렵다. 경북 산사태 10곳 중 9곳은 당초 ‘위험’ 분류지가 아니었다. 그곳에 ‘산불 나면 헬기라도 타고 달려오겠다’던 대통령은 없었다. 그러곤 산사태 마을 찾아 “몇백톤 바위 저도 살면서 처음 본다”고 한 말이 공감과 위로가 되었겠는가. 세 가지만 또렷해진다. 나라는 안전치 않고, 정부는 나를 못 지켜주고, 각자도생해야 한다.

대한민국 기후 철학은 뒤죽박죽이다. 매뉴얼과 현장이 따로 놀고, 예방보다 복구에만 돈 퍼붓는 헛껍데기 방재다. 서울시가 1년간 사들인 ‘침수 우려’ 반지하 주택은 0.3%에 그쳤다. 올 10월 EU 탄소국경세가 선보이는데, 이 정부는 2030년까지 할 탄소감축량 75%를 임기 뒤로 미뤘다. 기후위기를 미래로 보다가, 곧 닥칠 돈으로 알다가, 생명을 위협받는 나라가 됐다.

오늘도 TV엔 황토물이 흐른다. 비 그치면 폭염, 민초들은 세간살이 말리고 무너진 둑·길·축대를 세울 것이다. 농축산물값이 뛰고, 세상 얘기도 재개될 것이다. 일본 원전 오염수 안전을 한국 정부가 선전하고, 대통령 처가 땅에 걸려 15년 된 고속도로 사업이 서고, 실직자는 ‘시럽급여’로 놀림받는다. 어느 것도 정부의 미더움은 없다. 민주주의 위기는 삶의 위기에서 온다. 1년 전 반지하촌, 9개월 전 이태원, 오늘 물난리에서 사람들이 거듭 묻는다.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어디 있는가.

이기수 편집인·논설주간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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