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 노조 이끌며 전노협·민주노총 산파 역할하셨죠”

한겨레 2023. 7. 1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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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이 밝아 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 /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1993 년 겨울 나는 전북지역 80 여 명의 노동자로 현주억 의장 출소 환영단을 구성하여 청송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한 고인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2000 년 민주노동당 창당발기인으로 함께하였으며 2002 년 민주노동당 전북도당을 창당하고 나는 전북도당 위원장을, 고인은 익산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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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현주억 전 전노협 의장대행을 추모하며
고인의 빈소. 염경석 전 본부장 제공

건축기사로 설계사무소 일하다
노조 이끌며 노동운동 본격 투신
90년 전노협 창립 이듬해 의장대행
정권 탄압에 2년6개월 옥살이
출소 뒤엔 진보정당 활동 헌신

폭우에 부유물 제거하다 사고사

‘새날이 밝아 온다 동지여 한 발 두 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 (…) / 노동자 해방의 그 날을 위해 이제는 하나다 전노협.’

지난 17일 늦은 7시 장마전선이 한반도를 덮고 있던 그 시각 전북 익산시에 있는 원광대병원 장례식장에 민중가요 ‘전노협 진군가’(김호철 작곡, 김애영 작사)가 울려 퍼졌다.

전노협 출범 1년인 1991년 당시 단병호 전노협 의장이 구속되자 부위원장으로서 의장 직무대행을 맡은 업보로 2년6개월 옥살이를 했던 현주억 의장대행(이하 의장)이 지난 14일 향년 68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전북지역 70여 노동시민 사회단체가 공동으로 추모식을 했다.

1990년 출범한 전노협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 즉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고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살인적인 노동현장을 바꾸고자 하는 천만 노동자의 열망이 만들어 낸 전국단위 노동자 연대조직이었다.

고인은 1980년대 초 전북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건축기사로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와 1982년 석탑노동연구소를 세운 장명국 선생의 영향을 받아 같은 설계사무실에 근무하던 후배가 주도한 익산시 건축사노동조합 제2대 위원장을 맡아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로 전국건축사 노동조합 위원장을 지냈으며 전북지역노동조합연합의 제2대 의장으로도 활동했다. 이때 익산 수출입공단에 자리한 골프장갑 제작업체인 아세아스와니 노동자들의 폐업철회와 체불임금과 퇴직금 지급을 요구하는 일본 원정투쟁을 지원하고, 익산 창인동 성당 안에 있던 노동자의 집 소속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 연대 활동을 하는 등 익산과 전북 지역에서 노동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

고인은 역사가 요구한 소임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정권의 탄압을 피하지 않고 전노협 의장 직무대행을 역임한 죄목으로 2년6개월 옥고를 감수해야 했다. 출소 이후 후배 건축사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수’ 건축사 설계사무소를 운영했다.

1993년 겨울 나는 전북지역 80여 명의 노동자로 현주억 의장 출소 환영단을 구성하여 청송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한 고인과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인연은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발기인으로 함께하였으며 2002년 민주노동당 전북도당을 창당하고 나는 전북도당 위원장을, 고인은 익산지구당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첫 번째 맞이한 2004년 총선에 나와 고인을 비롯한 5명의 당직자가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여 각각 8∼9%의 득표를 하였다. 이렇게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정당지지율 13%로 10명의 국회의원이 원내 진출하는 역사의 밀알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진보정당의 정치 혁명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으로 실패하고 말았으며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고인과 나는 진보신당과 정의당 당원과 당직자로 활동해 왔다.

고인은 전북 민주노조운동을 조직화하고 대중화하였으며 전노협을 강화하고 오늘날 민주노총이 태어나도록 산파 역할을 했던 전북지역 최초의 사무직 노동자이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성격과 겸손하지만, 강단 있는 성품으로 민주화를 위한 노동자의 거센 요구에 부응하며 노동조합 간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고인의 사망 원인은 기후 위기가 가져온 기습폭우라는 재난이다. 익산시 함라산 기슭에 내린 300mm의 물 폭탄으로 고인이 거주하던 주택 옆 수로는 부유물로 물길이 막혀 범람하였고 마을 피해를 우려한 고인은 물길을 막은 부유물을 제거하려다 거센 물살에 휩쓸려 수로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한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 이데올로기가 세를 얻으면서 노동 계층이 양극화하고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창립 정신이 퇴색해 가고 있다. 노동운동 후배들은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평등과 평화의 시대를 앞당기는 노동운동이 되도록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고인의 영전에 바친다.

전노협과 민주노총 출범의 산파, 영원한 노동자 현주억 전노협 의장님의 영면과 안식을 추모합니다.

염경석/전 민주노총 전북본부 1∼4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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