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카리스마: 중요한 건 스타일 아닌 ‘과업의 내용’
김용석 | 철학자
우리나라에서는 정치 영역에서 카리스마(charisma)라는 말을 비교적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별도 연구 대상이겠지만, 그런 현상은 일상적 언어 사용에서 관찰할 수 있다. 사람들은 ‘카리스마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몇주 전 내 ‘언어탐방’ 칼럼을 가끔 본다는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로맨스, 스캔들도 흥미로운 소재이지만, 카리스마에 대해서는 안 썼네.” 특히 지금 노년 세대들은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익숙한 것 같다. 오랜 세월 독재정권을 경험했기 때문 아닐까, 라는 의심도 가져본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2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사회·정치 영역에서 사용하는 의미로서 카리스마는 20세기 이전에는 쓰지 않던 말이다. 이는 단어로서 카리스마가 역사적 부침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카리스마는 고대 그리스어 ‘카리스’(kharis)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카리스는 폭넓은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은혜, 호의, 선물, 그리고 매력과 아름다움 등의 뜻을 모두 포함했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세 여신을 가리키는 카리테스는 카리스의 복수형이다. 어원학자 에밀 뱅베니스트는 선물과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과 쾌락(육체적인 것을 포함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도 그 말을 썼다고 한다. 카리스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말이었다.
카리스에는 신이 부여하는 아름다움과 재능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이는 하늘로부터 받은, 곧 천부적이라는 의미에 가깝지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기원후 1세기 그리스도교 전파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 말에 각별히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지성사를 연구한 존 포츠는 <카리스마의 역사>에서 “특정 개인이 지닌 특수한 자질이나 재능이라는 카리스마의 의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글에서 시작되었다”라면서 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한다.
사도 바울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설득력 있게 전도하기 위해 창의적 언어가 필요했다. 카리스라는 세속어는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는 데 적합했고 그리스도교로 새롭게 개종한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되었다. 바울은 그 말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켰다.
카리스에 붙은 접미사 ‘마’(ma)는 절대유일신의 은총을 받은 결과를 의미했다. 곧 신의 은총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부여한 구체적 재능이자, 종교공동체에서 신자들이 그 능력에 따라 행동한 결과를 가리켰다. 바울은 신의 은총으로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재능들을 일일이 열거하기 위해 ‘카리스마타’라는 복수형 명사도 사용했다. 그런 재능에는 기적의 효과를 내는 예언, 치유, 방언의 은사도 있었지만, 봉사, 원조, 자비 같은 세속적 능력도 포함돼 있었다.
다양한 은총이 교회공동체 신자들에게 내려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카리스마가 사도, 예언자, 지도자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님을 뜻한다. 포츠가 말했듯이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에서 모두가 카리스마에 접근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곧 바울이 강조한 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공동체였다. “바울이 상술한 다양한 카리스마 중에서 리더십이나 권위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다.” 바울에게 카리스마는 본질적으로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연관된 것이었다.
20세기 이르러 고대의 언어를 발굴해서 카리스마의 개념을 지배의 형태, 권력관계, 권위, 리더십 등과 연관 지은 사람은 막스 베버다. 베버가 종교언어를 사회·정치적 술어로 차용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독일 학계의 신학논쟁이 깔려 있었다. 베버는 그 논쟁 과정에서 거론된 카리스마라는 술어를 차용했다. 베버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연상시키는 이 말로 바울이 강조했던 공동체 의식이 아니라 개별 지도자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지배하는 능력을 부각시키는 사상을 전개하고자 했다. 베버 역시 그 말의 의미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변형시켰던 것이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은 현대의 교양이 되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말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카리스마란 한 개인의 비일상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자질을 말한다. 그는 초자연적이거나 초인간적인, 곧 아무나 지닐 수 없는 능력과 특성을 갖추었거나, 아니면 신이 보냈다고 여겨지거나 또는 모범적인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지도자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증명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영웅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면, 그가 지속적으로 실패한다면, 무엇보다도 그의 지도력이 추종자들에게 복리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은 카리스가 사용되던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언어의 매력’ 덕분에 정치 분야를 넘어서 다양한 의미 분화를 거쳐 대중적으로 널리 퍼졌다. 최근 만들어진, ‘이성을 유혹하는 능력’을 뜻하는 제트(Z)세대의 은어 ‘리즈’(rizz)라는 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글의 서두에서 암시했듯이 우리나라 정치 영역에서 카리스마가 여전히 주목받는 언어이자, 유난히 왜곡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치의 일상용어로서 카리스마는 강철 같은 의지, 꺾이지 않는 소신, 빠르고 강한 추진력 등의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카리스마의 핵심이 탁월한 능력 발휘로 이루어내는 ‘과업의 내용’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내용의 중요성은 바울의 가르침에서나 베버의 사상에서나 마찬가지다. 치유의 기적에도 치료된 사람이라는 내용이 있고, 봉사에도 공동체를 돕는 구체적 내용이 있다. 영웅적이고 혁명적인 지도자가 증명해 보여야 하는 것도 정치적 과업의 내용이다. 증명해 보인다는 것은 내용을 확인해준다는 뜻이다. 의지, 소신, 추진력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을 담보하고 있지 않다. 속된 말로 ‘콘텐츠 없는 액션’이다.
카리스마를 행동 방식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카리스마를 연출하고 카리스마를 가진 것처럼 연기한다. 현대 민주주의의 시민들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거부하거나 의심한다. 하지만 종종 ‘가짜 카리스마’에 속기도 하고 열광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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