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인도
인도인들은 인도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고, 구법승들은 인도를 ‘중국’이라고 칭했다. 현장은 인도에서 자기 나라를 ‘지나국’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그 말이 산스크리트어로 들어가 ‘치나스타나’가 됐다. ‘지나의 땅’이라는 뜻이다. 당대 인도인들이 보기에 중국은 문명이 뒤떨어진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번역은 문명을 옮기는 일이다. 물질문명의 이동은 물자를 옮기는 것으로 끝나지만 정신문명은 번역을 통하지 않으면 온전히 옮겨지지 않는다. 고대 로마의 마지막 철학자로 불리는 보에티우스(470~524)가 그런 사실을 증언한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할 무렵 태어난 보에티우스는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한 뒤 로마로 돌아와 동고트족 테오도리쿠스왕 치하에서 집정관을 지냈다. 보에티우스는 그리스 철학을 라틴어로 번역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지혜를 전해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작품을 내 손에 들어오는 대로 로마의 문체로 바꾸고, 그 책들에 대한 주해를 라틴어로 기술하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리학의 정교함, 중요한 도덕적 경험, 진리의 자연스러운 예리함으로 썼던 모든 것을 나는 정확하게 그대로 옮기고, 주석의 빛으로 이해하기 쉽게 만들 것이다.”
보에티우스는 번역과 주해를 통해 “시민을 가르치는 일”을 “국가를 돌보는 일”로 보았다. 그러나 보에티우스의 꿈은 테오도리쿠스왕의 변심으로 날개를 채 펴기도 전에 물거품이 됐다. 테오도리쿠스는 모반 혐의를 씌워 보에티우스를 파비아의 감옥에 가두었다.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번역서와 주해서를 겨우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철학서는 보에티우스 사후 600년이 지난 뒤에야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12세기에 다시 발견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가장 큰 수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였다. 그리스어를 몰랐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번역서에 기대어 중세 기독교 신학을 재건축했다. 그 시절 아리스토텔레스 번역본 중에는 원뜻을 알아보기 어려운 아랍어 중역본이 많았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정확하게 읽으려면 좋은 번역본이 필요했다. 아퀴나스는 도미니쿠스회 신부 굴리엘모 모에르베케가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을 새로 번역한다는 소식을 듣고, 번역문이 나오는 대로 입수해 읽었다. 거의 실시간으로 받아든 새 번역본이 없었다면 아퀴나스의 신학이 그렇게 정교하게 구축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문명 번역은 중세 유럽에 그치지 않는다. 7세기 신라의 불교 사상가 원효(617~686)의 방대한 저술도 중세 유럽을 능가하는 대규모 번역운동의 은혜를 입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이나 <금강삼매경> 주해 작업은 당나라 장안에서 벌어지던 한역 사업과 연동돼 있었다. 장안의 번역 집단이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한문으로 옮겨 펴내면, 곧바로 바다 건너 신라로 들어왔다. 경주의 원효는 그 번역서들을 입수해 읽었다. 옛 번역서들이 ‘중관사상’을 중심으로 한 것과 달리, 새 번역서들은 ‘유식사상’이 중심이었다. 원효는 대승불교의 두 사상을 회통시켜 ‘일심사상’으로 세웠다. 당대의 번역 사업이 있었기에 원효의 사상도 빛나는 위용을 갖출 수 있었다.
그 번역 사업을 주도한 사람이 훗날 삼장법사라고 불리게 된 당나라 승려 현장(602~664)이었다. 젊은 학승 현장은 중관사상보다 늦게 일어난 유식사상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기존의 번역서로는 유식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타는 듯한 앎의 갈증을 느낀 27살 학승은 당 태종의 금령을 뚫고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구하러 인도로 떠났다. 구법승의 서역행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현장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길을 잃고 물 한방울 없이 몇날 며칠을 견뎠다. 힌두쿠시산맥 설산을 넘고 인더스강 급류를 가까스로 건넜다. 1년여 만에 인도에 도달한 현장은 갠지스강을 따라 들어가 날란다 사원에 이르렀다. 날란다 사원은 당대 세계 최고의 대학이었다. 아시아 각지에서 온 유학승들을 포함해 학승 1만명이 숙식하며 배움을 구했다. 날마다 100여 강좌가 열렸다. 현장은 이곳에서 유식사상의 정수를 익혔다. 이어 인도 전역을 돌면서 산스크리트어 서적을 모았다.
643년 귀국 길에 오른 현장은 불교서적을 담은 상자 520개를 말 22마리에 싣고 실크로드를 따라 2년 뒤 장안으로 돌아왔다. 인도로 법을 찾아 떠난 지 16년 만이었다. 현장이 가져온 산스크리트어 서적은 경전과 논서를 포함해 657부에 이르렀다. 유식학과 중관학의 논서들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문법서와 인도 논리학 서적도 있었다. 현장은 당 태종의 지원을 받아 번역 집단을 꾸리고 19년 동안 한역본으로 1335권에 이르는 원서를 번역했다. 현장의 번역은 5세기 초 서역 승려 구마라집의 번역을 넘어서는 고대 세계 최대의 번역 사업이었다. 현장의 번역과 함께 신역과 구역을 두고 동아시아에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을 뚫고 회통의 길을 찾은 이가 신라의 원효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문명 번역의 일방성이다. 당시 인도는 베다사상 출현 이래 수천년 동안 축적된 정신문화의 중심이었다. 원자론부터 우주론까지, 유물론부터 유심론까지 거의 모든 사상이 나타나 각축을 벌였다. 학파끼리 논쟁이 그치지 않았고 논리학을 무기 삼아 공개 대결을 벌였다. 현장이 불경과 함께 논리학 서적을 가져온 것도 논리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인도인의 논리주의에 깊이 감명받은 결과였다. 인도에서 현장은 열등감을 느꼈다. 중국의 책 <노자>를 가져갔지만 인도 문화에 압도당해 내놓지도 못했다. 현장의 새 번역서를 본 당 태종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불경을 보니 하늘을 쳐다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이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법사(현장)는 이처럼 뜻이 깊은 법을 얻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종지의 근원이 광대하여 끝을 알지 못하겠다. 유가나 도가나 그 밖의 종교는 불법의 바다에 비하면 작은 연못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인들은 인도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고, 구법승들은 인도를 ‘중국’이라고 칭했다. 현장은 인도에서 자기 나라를 ‘지나국’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그 말이 산스크리트어로 들어가 ‘치나스타나’가 됐다. ‘지나의 땅’이라는 뜻이다. 당대 인도인들이 보기에 중국은 문명이 뒤떨어진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인도인의 자국중심주의는 알 비루니라는 11세기 중앙아시아 학자가 쓴 <인도의 책>에도 나타난다. 알 비루니는 이렇게 썼다. “인도인들은 세상에는 자기 나라밖에 없고, 자기들 나라만 한 나라도 없으며, 자기들의 왕 같은 왕도 없고, 자기들의 종교만 한 종교도 없고, 과학도 오직 자기들 것이 최고라고 믿는다.”
중국이 그토록 불교를 배우려 힘썼지만 정작 인도에서는 현장의 구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가 자취를 감추었다. 불교를 낳은 전통 종교 힌두교가 불교를 도로 흡수했고, 붓다는 힌두교 신 비슈누의 아홉번째 화신이 됐다. 11세기 이후 이슬람이 인도에 침입해 수백년 동안 위세를 부렸지만, 이슬람은 인도 아대륙 서북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정신문화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18세기 이후 영국의 지배도 마찬가지였다.
인도 독립을 이끌어 신생 인도의 총리가 된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유언장에서 인도 문명의 젖줄인 갠지스강에 대해 이렇게 썼다. “강은 인도의 것이며 인도인의 사랑을 받는다. 인도 국민의 기억과 희망과 두려움, 개선가와 승리와 패배가 뒤섞여 굽이굽이 흘러간다. 강은 지금 이 순간까지 흘러와서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네루는 동서 냉전시대에 미·소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 비동맹운동의 기수가 됐다. 스스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인도의 자긍심은 오랜 식민지 시절을 겪고도 바뀌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은 중국을 포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을 세우고 인도를 끌어들여 안보협의체 쿼드(Quad)를 구축했다. 그러나 동시에 인도는 중국·러시아가 포함된 브릭스(BRICS)의 일원이며, 중국이 서방을 견제하려고 만든 상하이협력기구(SCO) 회원국이다. 인도는 어느 편에도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린다. 인도의 경제력은 식민 종주국이던 영국을 제치고 세계 5위에 이르렀다. 지금 성장속도로 보면 10년 안에 독일과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인구로는 이미 세계 최대의 나라다.
우리가 아는 붓다상은 대개 눈을 반쯤 감고 내면을 응시하는 상이다. 그러나 초기에 인도에서 세운 붓다상을 보면 눈을 부릅뜬 채 세상을 직관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도는 눈길을 안으로 돌린 붓다상과 같았다. 지금 인도는 눈을 바로 뜨고 세상을 향해 일어서고 있다. 인도가 직립하는 날, 세계는 미국 일극체제도 미·중 양극체제도 아닌, 여러 힘이 길항하는 다극체제가 될 것이고 그 중심에 인도가 있게 될 것이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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