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하면 산다'는 기적 같은 개미의 힘, 베짱이의 노래였다 [작가와의 대화]

최진숙 2023. 7. 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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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이 여름에 베짱이가 없다면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만난 그림 한 장의 기억이 새롭다.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다. 앞치마를 두른 개미가 문 앞에 서 있고 베짱이는 문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밥 좀 주세요" 하는 그림이다. 개미 집 안에는 난로 위에 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따뜻하고 풍요로워 보였다. 자, 이런 사진에서 누가 문밖에서 떨며 밥을 구걸하는 베짱이가 되겠는가.

그래서 선생님들은 개미가 되라고 세뇌를 시켰다. 해서 우리는 개미가 되려 했다. 두 손에 힘을 꽉 주며 "그래 우리 개미가 되자"라고 일기장에도 썼던 것 같다. '부지런하지 않으면 굶는다'라는 것

우리는 어디선가 위로를 받는다. 음악이 있고 미술이 있고 문학이 있지만 정작 우리가 어디에서 위안을 받는지 아무도 모른다.

은 그 시절의 명제였지만 개미 이야기는 우리들이 조직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통일 이야기보다 더 시급했던 것이다.

'부지런하면 산다'는 인간 삶의 기본 명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부지런한 개미가 자신의 몸보다 큰 먹이를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어떻게 끌고 갈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개미는 힘이 억세게 센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며 생각했다. 개미가 자신의 몸보다 더 큰 먹이를 끌고 뙤약볕 속을 끙끙거리며 갈 수 있었던 극복의 힘은, 그래서 한겨울의 먹이까지 저축해 둘 수 있었던 도전의 힘은 개미의 힘만이 아니라 제3의 힘이 작용했을 거라는 것이다.

개미박사 최재천 교수의 말을 빌리면 개미의 매력은 그들의 외모가 아니라 인간을 뺨칠 정도로 조직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그들의 정신세계에 있다고 했다. 언뜻 보아 우리보다 훨씬 전체주의적 정치사상을 지닌 그들이지만 민주주의적 틀 속에 개인의 권익을 중시하는 걸 보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400만년 정도이고, 개미는 약 8000만년이라고 하니 그 시행착오의 역사와 전진은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개미의 역사보다 우리가 개미를 성공의 주인공으로 가슴에 새겨야 했던 것은 바로 "배불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배불리는 일이 그렇게 어려워지지 않을 때 대학생이 되고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선이 넓어질 때 개미의 반대편에 선 베짱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개미의 제3의 힘은 베짱이의 노래였다고 나는 단정했다. 그 노래가 개미의 힘이었던 것이다.

개미가 자신의 본래 에너지보다 놀라운 힘을 부풀린 것은, 그렇다. 그것은 베짱이의 노래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베짱이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놀고먹은 것이 아니라 베짱이도 만약 가수였다면 일을 한 것은 아닐까. 예술을 돈으로 지불하지 않는 무지한 시대의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선가 위로를 받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른다. 음악이 있고 미술이 있고 문학이 있지만 미술치료, 음악치료, 시치료가 있지만 정작 우리가 어디에서 위안을 받고 우리가 고통스럽고 상처 많은 시절을 견디며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푸르른 하늘일지도 모르고, 초록이 넘실거리는 한여름 숲이었을 수도 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친구가 "너는 잘할 것 같아"라고 한 한마디에서 두 손에 힘이 주어지는 일이 왜 없었겠는가.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고 밥을 먹고 돈으로 호사를 하지만 외롭고 쓸쓸하여 내상(內傷)이 심한 사람들의 위안은 정작 돈을 지불하지 않고 소위 문화라는 아주 작은 계기에서 죽음을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 왜 없겠는가.

쓸쓸히 걷는 길에서 들리는 상점의 음악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듣던 노래를 입으로 따라 흥얼거리다 웃어버리는 그런 일…. 사실은 널려있는지 모른다. 한옥 기와집 처마 밑에 흐르는 가을 햇살이나, 한강의 묵묵한 흐름이나,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새벽에 등교하는 학생이나 직장인들도 보통의 일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는 위안과 응원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의 움직임은 중요한 예술의 모티브가 되는 것인데 바로 그 움직임이야말로 리듬의 가락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주어진 공용의 자산을 무시한다. 푸른 하늘이나 구름 숲 그리고 거리의 나무들…. 바람이나 꽃들은 사실 무상으로 주어진 우리들의 공용자산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공용자산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니 그 자산을 키우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잠시 "좋다"라거나 "아름답다"라거나 생각하지만 내 것이라는 책임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생명인 환경을 내던지고 살았는지 모른다. 환경생명은 단지 나무나 숲이나 강만은 아니다. 인간의 의식이다. 우리의 것이라는 공용자산을 아끼고 가꾸고 돌보는 심성이 바로 환경보호의 우선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베짱이의 노래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워한다. 감상에 젖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내일 강의 약속도 하나 있고, 내일까지는 먹을 사과가 남아 있는데도 어깨가 이리도 시려서 영 힘이 나지 않는 나도 어디엔가 베짱이의 노래가 있다고 믿고 있다.

베짱이는 책일 수도, 노래일 수도, 그림일 수도, 사람일 수도 있다. 한편의 시가 베짱이일 수 있다. 저 하늘, 구름, 바람, 숲, 나무가 베짱이일 수 있다. 자신의

베짱이는 책일 수도, 노래일 수도,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큰 힘을 만들어 내는 일은 바로 예술이며 환경이다.

능력을 극복하여 더 큰 힘을 만들어 내는 일은 바로 예술이라는 것이며, 바로 환경이라는 점을 오늘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思惟)의 원천은 바로 리듬감각이다.

내 몸의 마지막 피 한방울

마음의 여백까지 있는 대로

휘몰아 너에게로 마구잡이로

쏟아져 흘러가는

이 난감한

생명이동

신달자 시인
'그리움'이란 졸시다. 이 시대의 베짱이는 너무 몸을 불려 절제와 선택이 필요하게 되었다. 베짱이의 노래로 개미가 기적의 힘으로 겨울 준비를 하는 것처럼 지금도 미래를 위한 문화적 위로를 누구나 소유할 과제를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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