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박근혜 구상권 청구에 답변 피한 정부…“책임자 꼬리 자르기식 태도”
정부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짐으로써 삼성물산 주주들이 입은 피해는 국가가 책임질 사안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당시 합병에 대한 책임이 있는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한 구상권 청구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은 답할 단계가 아니다”며 즉답을 피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국가 배상에 이르는 데 실질적인 책임이 있는 이들에 대해 ‘꼬리자르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무부는 18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에 1300억원 상당을 배상하라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의 판정에 불복해 영국 법원에 취소소송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2015년 당시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정부와 별개로 이뤄진 독립된 의결권 행사이며, 정부가 이 사안에 대해 책임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삼성 합병 관련 직권남용 유죄 확정 판결과 엘리엇이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은 ‘법상 궤를 달리한다’고 주장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공직자 개인의 일탈 행위일 뿐, 이것을 정부의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했다.
법무부는 엘리엇이 제기한 사건은 ISDS를 제기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는 주장도 폈다. 한미 FTA 규정상 ISDS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귀책 사유가 국가에 있거나 정부가 특정 사건에 조치(개입)한 사실 등이 확인돼야 하는데, 엘리엇이 입은 피해는 정부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 “정부, 취소소송 사유 미흡…책임자에 구상권 청구해야”
정부가 이날 발표한 취소소송 사유는 정부가 그간 중재판정부에 주장해온 바와 거의 같다. 한 장관은 “항소라는 게 원심에서 주장했던 내용이 안 받아들여질 경우 다른 판단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수의 전문가들은 정부가 논거로 든 것이 통상적인 ISDS 불복 요건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중재판정부가 기각한 내용의 반복이라 취소소송의 실익도 없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회 김종보 변호사는 “ISDS 불복절차는 매우 엄격하다. 법무부가 밝힌 취소소송 사유는 기존 주장과 동일한 것으로서 승소가능성이 높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불복 절차를 제기하려면 절차상 중대한 하자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정부가 제기한 취소소송 사유에는 절차 측면에 대한 내용도 없다”며 “불복 사유가 안 된다”고 했다.
정부가 문형표 전 장관과 홍완선 전 본부장의 직권남용 유죄 확정 판결과 엘리엇 사건의 법리가 다르다고 본 것을 두고도 “말이 안 되는 논리”라는 지적이 나왔다. 2015년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캐스트보트는 국민연금이 쥐고 있었던 만큼, 의사결정 과정의 위법성과 의결권 행사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국민연금은 다른 소수주주와 달리 정부의 개입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했다”며 “그런데도 정부는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과정에서 나타난 불법적인 문제를 ‘개인의 일탈’로만 축소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사법부가 인정한 것과도 배치된다”고 했다.
법무부는 엘리엇 소송의 원인 제공자격인 박근혜씨와 이재용 회장에 대한 구상권 청구 계획에 대해선 ‘소송전략’을 이유로 입을 다물었다. 한 장관은 “확신을 갖고 취소소송을 하는 상황에 구상권 청구 계획을 밝히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다. 이에 대해 송기호 국제통상법 전문 변호사는 “취소소송 제기가 박근혜씨와 이재용 회장 등에 대한 구상권 행사 포기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엘리엇 중재판정문에 이재용 회장의 공동불법행위가 구체적으로 적시된 경우 이 회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것이 한국 정부에 실익”이라고 했다.
강연주 기자 play@kyunghyang.com,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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