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환자만 740만명 … 英 무상의료 최악 위기
1948년 출범해 올해로 75주년을 맞은 영국의 무상 공공 의료 체계인 국민보건서비스(NHS)가 사상 최악의 위기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고령화로 환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만성적 예산 부족으로 노후한 시설을 보수하지 못하고, 처우에 불만을 품은 의료진이 해외로 이탈하면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지났는데도 의료 현장 마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다급해진 영국 정부가 신규 인력 채용을 약속했지만 의료진 불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면서 NHS가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다는 진단이다.
1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와 NHS에 따르면 현재 영국에서는 740만명이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다. 2020년 팬데믹 직전 수치인 410만명보다 크게 늘어났다. 치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지난해 영국의 초과사망(일정 기간 예상되는 수준보다 높은 사망) 사례는 지난 50년 내 최고치로 높아졌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진 올해 들어서도 초과사망은 증가하는 추세다.
올해 1분기에는 초과사망자 중 절반이 코로나19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다. 영국 투자자문사 LCP의 스튜어트 맥도널드 데이터 전문가는 "주로 치료 지연이 치명적 결과로 이어지는 심혈관 질환자의 사망률이 급증했다"고 말했다.
NHS가 맞은 위기는 영국 정부의 장기화된 재정 긴축과 인구 고령화가 맞물린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0년 영국 보수당 주도하에 의료 지출 증가폭이 최소화되면서 NHS 소속 의료진의 처우가 악화되고 병원 시설 노후화도 가중됐다. 실제로 1998~2008년 연평균 5.1% 증가했던 영국의 의료 부문 지출은 2010~2019년 연평균 2% 늘었다. 이 때문에 의료진이 현장을 이탈하거나 해외로 떠나면서 인력 부족이 만성화된 상태이며, 병원 시설도 지난 10년간 매우 더디게 개선돼왔다. 그 결과 유럽 주요국보다 1인당 의사와 병원 병상 수가 적어졌다.
NHS에 따르면 현재 NHS 내부에 공석으로 남아 있는 일자리는 11만2000개로 정원의 10%에 해당하며, 2011~2019년 영국의 가용 병상 수도 6% 줄어들었다.
영국 건강연구기관 너필드트러스트의 나이절 에드워즈 최고경영자(CEO)는 NYT에 "긴축이 상황을 훨씬 더 악화시켰다"며 "수년간 진행된 예산 절감 조치가 시스템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다급해진 영국 정부는 지난달 의료 인력을 향후 15년간 30만명 확충하고, 5년간 24억파운드(약 4조원)를 NHS에 추가 투입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의료진의 급여 개선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의료 현장의 반발을 샀다. 지난 12일 전공의는 즉각적인 임금 인상과 인력 확충을 요구하면서 18일까지 파업에 돌입했다. NHS 소속 의사가 닷새 넘게 파업에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공의들은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해 지난 15년간 실질임금이 26%나 감소했다고 주장하며 정부에 임금을 35% 올려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전공의 뒤를 이어 전문의도 이달 20일부터 48시간 동안 파업에 나설 예정이다.
NHS 위기가 구조적 요인에 의한 것인 만큼 단순한 해결책으로는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의료 지출에 예산을 더 투입한다고 가정해도 인구 고령화 국면에서는 지속이 불가능하다. 저성장에 시달리는 영국 경제 상황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재정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전문가들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NHS 일부를 민영화하거나 일부 질환 치료에 한해 요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재정을 투입하는 현 구조에서 사회보험 체계로 전환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NHS가 복지국가 영국의 정체성을 대표한다는 상징성 때문에 정치권에서 섣불리 메스를 들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NYT는 "복지국가 영국의 자랑스러운 상징이 역사상 가장 깊은 위기에 처해 있다"며 "정치인은 눈앞에서 잠식되고 있는 시스템을 위해 치어리더가 될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최현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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