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정신의 탕약, 독서가 날 사람꼴로 빚어"
행여 한국인이 그의 얼굴과 이름을 모를 순 있어도 그의 시 '대추 한 알'은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로 시작되는 시인 장석주(68)의 짧은 시는, 한 알의 열매에서 시련 뒤의 희망을 붙잡는다.
국민 애송시가 처음 출현했던 시점을 알기란 쉽지 않다(2005년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 수록). 4년 전 이미 100권을 넘겼을 만큼 장석주 시인의 저서가 너무 많아서다. '연평균' 두세 권. 다작(多作)이면서도 한 문장도 버릴 게 없어 경탄케 만드는 그의 책은 늘 독자와 출판계 신뢰를 한몸에 받는다.
장석주 시인이 새 산문집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를 출간했다. 루마니아 소설가 에밀 시오랑(1911~1995)을 중심에 두고 우리 시대의 책 읽기를 사유한 책이다. 최근 서울 서교동 현암사에서 그를 만나 인간의 조건으로서 독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에밀 시오랑은 삶 자체가 모순이었죠. 항상 '죽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고 갔으니까요."
시오랑은 철학 에세이 '태어났음의 불편함' '독설의 팡세' 등 저서로 삶의 의미를 좇은 유명 사상가다.
시오랑은 삶을 출구 없는 미로처럼 여겼다. 그래서 자주 자살을 입에 올렸다. 그는 인간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불편하다'고 여겼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재난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났다는 것, 그것은 공포라고 시오랑은 쓴다.
"지독한 염세주의죠. 하지만 시오랑 철학은 비관주의가 전부가 아니라는 데 매력이 있습니다. 실존의 불안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삶이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과정이라고 봤으니까요. 극과 극은 통하는 법입니다. 인간이란 불안 속에서 삶의 이유를 찾아다니는 존재 아닐까요. 시오랑을 읽는다는 건 삶의 이유를 찾는 일입니다."
삶의 이유는 자기 내면에서 발굴된다. 책은 내면을 비추는 면경이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노라면 자꾸만 종이책의 위상이 축소된다. 이번 산문집엔 사라지는 종이책에 관한 안타까움이 진하다.
"인지생리과학자 매리언 울프는 인간의 운명이 성장할 수 있던 계기를 '책 읽는 뇌'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봤습니다. 독서 능력은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후천적 학습입니다. 책 읽기를 그만두면 뇌의 배선과 회로가 사라질 거예요. 활자가 없는 시대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종이책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줍니다."
기계의 세상에서 인간은 '심심함'을 잃어버렸다고도 그는 본다.
"인간이 불행해진 건 방에서 혼자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서 시작됐어요. 활동적인 삶, 분주한 삶보다 더 갈급한 삶은 심심한 삶이에요. 심심해져야 해요. 심심함은 창조로 가는 첫 문입니다."
현재 장 시인이 자신을 가리키는 '직업'은 문장노동자다. 출판계에선 누구나 장 시인의 문장을 탐낸다. 책을 '정신의 탕약'으로 여기는 그의 집 앞에는 매년 1000권 넘는 책이 도착한다. 매일 한 권 또는 두 권을 그는 자기 안에 소화시킨다. 그런 그의 문장을 숱한 문청이 탐독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독서란 세계를 열어보는 행위입니다. 책의 문장에서 생각지 못했던 착상이 떠오르고 사유의 확장이 일어납니다. 책을 읽으며 집중할 때 몰입의 순간이 오고, 몰입할 때 세계와 내가 하나로 혼용되는 경험을 하잖아요. 그때 희열이 있죠. 그 시간이 제게는 창조의 시간이에요."
장 시인은 최근 호암미술관의 '하늘 한 점 김환기' 전시 관련 강연 연단에 섰다. 주제는 '김 화백의 뉴욕 시절'. 엄청난 양의 책을 정신의 정원 안에 가꾸면서도 그는 독자에게 지식과 감정을 배양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책상엔 늘 책이 가득 쌓여 있어요. 일주일만 지나도 책이 쌓여서 책기둥을 이루게 됩니다. 바닥에도 책이 많고요. 가끔 보면 서재에서 마치 '종유석'이 자라는 것만 같죠(웃음). 저를 사람꼴로 빚어낸 건 다름 아닌 독서입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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