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탐욕 탓인가 임금 탓인가" 인플레 논쟁의 서막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이사벨라 베버의 탐욕 인플레
원재룟값보다 판매가격 더 올린
상당수 기업들 이익 크게 증가
기업 이윤 추구가 인플레 원인
보수학자·미디어 “어리석다” 비판
생산비·임금 등 ‘비용 인플레’ 주장
팬데믹 지나며 베버 주장 재조명
탐욕 인플레 이젠 분석해야 할 때
월급은 정말 고물가 부채질했을까
# 인플레이션이 한풀 꺾였다. 미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3.0%(전년 동월 대비)를 기록했다. 지난해 6월 9.1%로 정점을 찍은 후 12개월째 하락세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6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7%에 머물렀다. 2021년 9월 2.4%를 기록한 후 1년 9개월 만에 2%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면·과자 등 가공식품 중심의 생활물가는 지금도 민생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다.
# 이를 두고 인플레이션을 부추긴 게 무엇이냐는 논쟁이 격화하고 있다. 한쪽에선 전통적 경제학을 근거로 '비용 인플레'를 주장한다. 원자잿값, 자본조달비용, 임금 등이 오르면서 인플레가 퍼졌다는 논리다.
다른 한쪽에선 기업의 탐욕(Greed)이 고물가를 부채질했다는 다소 도발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팬데믹 기간에 발생한 인플레의 원인은 시장지배기업들이 판매가격을 과도하게 끌어올린 탓이란 거다. 과연 이 날선 담론의 무게추는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을까.
# 더스쿠프가 視리즈 '고물가 물가 찾기'를 통해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인플레를 자극한 원인을 따져봤다. 2021년 이사벨라 베버 매사추세츠대 교수가 설파한 '탐욕 인플레와 가격 통제론', 여기에 반발한 전통적 경제학자들, 둘 사이에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을 기사의 축으로 삼았다. '고물가 물가 찾기' 그 마지막 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이다.
# 이익의 급증
2021년 12월 말. 이사벨라 베버(Isabella M. Weber) 매사추세츠대 교수가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영국 진보매체 '가디언'에 보낸 기고문이 발단이었다. 칼럼의 한 토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인플레이션은 40년 만에 최고치에 가깝다. 전세계 중앙은행은 시장에 개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들은 (기업들이) 가격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바로 이익의 급증(an explosion in profits)이다."
# 전략적 가격통제
30대 경제학자 베버의 주장은 도발적이었다.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의 탐욕을 인플레의 원인으로 콕 짚었다. 대기업이 상품값을 과하게 끌어올려 물가상승을 부채질한다는 그리드플레이션(Greed+Inflation), 이른바 '탐욕 인플레'를 공론화했던 거다.
베버 교수의 의견을 더 들어보자. "시장지배력을 가진 대기업들은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발생한) 공급망 문제를 가격을 인상하고 횡재(이익)를 누리는 기회로 이용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플레를 잡고 싶다면 전략적으로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는 확장적 재정정책에 따른 통화량 증가, 팬데믹 기간 붕괴한 공급망 이슈, 임금 인상 등 주류 경제학자들이 늘어놓던 '인플레의 원인'을 정면으로 뒤집는 논리였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베버를 향해 날 선 반응을 보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참고: 곡물값·유가 등 원재룟값을 끌어올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베버 교수의 기고문이 나온 지 두달 만인 2022년 2월에 터졌다. 이 때문에 베버의 '탐욕 인플레'와 '가격통제론'은 더 거센 비판을 받았다.]
# 보수 언론의 비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가장 먼저 반론을 펼쳤다. "나는 자유시장의 광신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정말 어리석다." 피터 쉬프 유로 퍼시픽 자산관리 수석경제학자는 "가격 통제는 인플레와 싸우는 게 아니라 증상을 은폐할 뿐"이라면서 베버의 주장을 거침없이 깎아내렸다.
보수 언론의 비판은 훨씬 더 원색적이었다. "비뚤어졌다(perverse·폭스뉴스)" "근본적으로 건전하지 않다(fundamentally unsound·코멘터리)" "확실히 틀렸다(certainly wrong·내셔널리뷰)"…. 그럼 베버 교수와 주류 경제학자, 그리고 보수 언론 중 누구의 말이 맞아떨어졌을까. 지금부터 논쟁의 결과를 확인해보자.
# 베버 vs 크루그먼
사실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건 간단하다. 공급망 붕괴, 임금 인상, 치솟은 원재룟값 등 주류 경제학에서 꼬집은 인플레의 원인들이 해소됐을 때 물가가 꺾인다면, 폴 크루그먼의 비아냥처럼 베버 교수는 '어리석은 학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폴 크루그먼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지표를 보자. 팬데믹 국면에서 무섭게 치솟은 '공급망 압력지수(GSCPI)'는 2021년 12월 4.31로 정점을 찍은 뒤 내림세를 탔다. GSCPI는 수치가 클수록 공급망의 혼잡도가 높다는 뜻이다. 2021년 12월을 기점으로 GSCPI가 하락했다는 건 인플레의 원인 중 하나였던 비정상적 공급망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았다는 의미다.
임금은 어땠을까.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2021년 미국의 실질 임금상승률은 월평균 -0.2%(전월 대비)에 머물렀다. 2022년에도 -0.3%에 그쳤다. 이 지표가 마이너스라는 건 임금인상률이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얘기다. 미국 노동자의 임금이 물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 원재룟값의 안정화
마지막으로 러시아-우크라 전쟁에서 기인한 원재룟값 상승 문제를 들여다보자. 연일 고공행진하던 곡물값은 지난해 중순 하락세로 돌아섰다. 2022년 3월 1부셸(27.2㎏)당 1425.20달러를 기록했던 소맥(빵·과자·간장 등의 원료)의 선물 가격은 4개월 만인 7월 806.7달러로 하락하며 안정세를 찾았다. 소맥과 함께 대표적 곡물로 꼽히는 옥수수 선물 가격도 지난해 5월 1부셸(25.4㎏)당 789.01달러로 정점을 찍고 7월 600달러대로 떨어졌다.
국제유가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인 지난해 3월 127.98달러(배럴당)까지 치솟았던 브렌트유 가격은 그해 8월 90달러대에 진입하면서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 변곡점 2022년
자! 이쯤에서 통계를 종합해보자. GSCPI는 2021년 12월, 곡물값·유가 등 원재료 가격은 2022년 7월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미 노동자의 실질 임금상승률은 마이너스였으니 논할 필요도 없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인플레의 원인이 2022년을 기점으로 해소된 셈이다.
그럼 그들의 이론대로 인플레도 꺾였을까. 아니다. GSCPI가 떨어진 2022년 1~7월 미 소비자물가지수(CPI)는 7.0%에서 9.1%로 되레 2.1%포인트 상승했다. 원재룟값이 하향 곡선을 그리던 2022년 7~12월엔 CPI가 떨어지긴 했지만 평균 8.15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예상이 사실상 빗나간 꼴이었다.
[※참고: 누군가는 '그래도 CPI가 떨어진 건 맞지 않느냐'고 반론을 펼지 모른다. 하지만 GSCPI, 임금, 원재룟값 등 세 변수가 인플레를 꺾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2022년 한해 기준금리(상단 기준)를 4.25%포인트(0.25%→4.50%)나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연준의 통화정책이 인플레를 억제하는 데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폴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에 베버 교수의 '탐욕 인플레와 전략적 가격통제론'을 에둘러 인정하는 듯한 칼럼을 썼다. "1985년 이스라엘은 부분적으로 가격을 통제함으로써 심한 경기 침체 없이 높은 인플레이션을 치료했다…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정통파적 정책을 기꺼이 제고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확실히 고무적이다(2023년 1월)."
# 인플레 잡는 해법
주류 경제학자의 학설에 균열이 생기자 베버 교수의 탐욕 인플레와 가격통제론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의 주장을 한번 더 요약하면 이렇다.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이 원재룟값 상승분 이상으로 가격을 끌어올려 인플레를 부추긴다. 인플레를 잡으려면 기업의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 인플레의 원인은 기업의 탐욕(Greed)에 있으니, 기업의 가격결정권을 통제하는 게 상책이란 얘기다.
베버 교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기관과 학자도 속속 등장했다. 미 캔자스시티 연방준비은행은 "2021년 인플레이션의 60%가 (가격을 끌어올린) 기업의 이익 때문에 발생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간했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힐치크는 LA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기업의 탐욕이 인플레의 주범이란 걸 명시적으로 인정했다. "21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임금은 82% 늘어났지만, 기업 이익은 600%가량 증가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에 따르면, 1960~1980년 기업의 마크업(원가를 제외한 이윤·markup)은 한계 비용보다 평균 26% 높았지만, 2021년 마크업은 72%나 높았다."
# 탐욕의 전리품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 국내에서 인플레를 부추긴 주범은 무엇이었을까. 베버 교수가 주장한 것처럼 기업의 탐욕이 문제였을까. 더스쿠프가 식료품·가공식품 등 민생과 밀접한 50개 품목의 2022~2023년 6월 물가를 분석해본 결과, 평균 물가가 3.2% 오르는 동안 가공식품값은 7.9%나 상승했다.
비슷한 기간(2021~2022년) 노동자의 실질 임금상승률은 -0.2%에 그쳤다. 시장을 지배하는 식품업체들의 가격 인상이 물가를 자극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기업들의 고삐 풀린 욕심은 '실적 증가'란 전리품까지 안겼다. "원재룟값이 올라 어쩔 수 없다"면서 몇몇 제품의 가격을 끌어올린 농심·오뚜기·오리온 3사의 매출 총합은 20 21년 7조7575억원에서 2022년 9조1856억원으로 18.4% 증가했다. 영업이익 총합 역시 같은 기간 18.6%(6456억원→7656억원) 늘어났다.
# 무너진 임금 변수
자, 어떤가. 오늘날 인플레의 요인을 분석하는 관점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히 '임금 상승→상품 수요 증가→공급 부족→물가 상승'이란 전통적 경제학의 논리는 힘을 잃고 있다. 세계 각국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팬데믹 이전보다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로버트 라이시 전 미국 노동부 장관이 가디언에 기고한 칼럼을 읽어보면, 인플레의 '숨은 원인'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드러난다. "임금 인상은 인플레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근로자의 급여는 실질 구매력 면에서 줄고 있다. 임금은 인플레를 유발하는 게 아니라 인플레 압력을 제어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윤-가격 인플레'다. 기업은 재료, 부품, 노동 비용의 상승분을 핑계로 가격을 끌어올려 더 큰 이익을 얻고 있다." 이제라도 살인적인 고물가를 떠받치고 있는 게 기업의 탐욕은 아닌지 냉정하게 고찰해야 하는 이유다.
다만, 우리나라의 시장주의자들이 이런 현실을 어디까지 받아들일지는 의문이다. '친기업 성향'을 가진 윤석열 정부의 경제 각료들과 전경련을 중심으로 다시 규합하는 재계가 베버 교수의 '탐욕 인플레'를 전면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이를 잘 보여주는 건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수장인 추경호 경제부총리 다. 지난 6월 라면값을 꼬집으면서 기업의 '탐욕 인플레'에 한발 다가서긴 했지만, 1년 전 그가 남긴 발언을 가볍게 넘길 수만은 없다.
"임금은 기본적으로 생산원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고임금이 다시 물가를 상승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것은 경제학의 기본이다. IT기업과 대기업에서 고임금 현상이 확산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과도한 임금 인상을 자제해달라(2022년 6월 28일·한국경영자총협회 만남)."
언제쯤이면 '임금이 물가를 끌어올리는 주범'이란 고정관념을 떼칠 수 있을까. 베버 교수의 이론을 받아들인 경제학의 거장들처럼 시장만능주의를 '정론'으로 여기는 현 정부의 각료들도 달라질 수 있을까. 고물가의 주범을 찾는 작업은 어쩌면 지금부터다.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chan4877@thescoop.co.kr
강서구·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 참고: 554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은 7월 10일 발간한 경제매거진 더스쿠프 視리즈 '고물가 주범 찾기'의 총론입니다.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