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 아동정책과 보수의 가치[시평]

2023. 7. 18.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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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호주제 폐지 뒤 사회규범 변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 중요
미등록출생아 사태 성찰할 때
보수는 인간 존엄과 자율 존중
英·獨 보수정부가 아동法 제정
패러다임 전환 없인 백약 무효

사회규범·가치는 개인과 집단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나 카를 융은 이것을 초(超)자아나 집단무의식이라고 봤다. ‘가문을 이어가는 것’을 중시하는 호주제도가 사회규범인 때는 ‘결혼과 출산’이 자명한 의무여서 초면에도 결혼·출산 여부를 묻는 게 자연스러웠다. 좋은 아파트 소유가 사회가치이기 때문에 어디 사는지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차별은 개인에게 깊은 고통을 주기에, 세상의 절반인 여성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호주제도는 2005년 폐지됐다. 가문의 굴레에서 개인이 해방됐다. 그러나 호주제도가 긍정적 가족 가치로 대체된 게 아니어서 사회규범에 공백이 생겼다. 그 공백 속에서 아동과 노인, 장애인 돌봄이 가족 부담으로만 인식되기 시작했다.

치매 국가책임제 이후 유행처럼 번지는 가족돌봄 영역에서의 국가책임 주장은 선진국과 달리 현금성 지원 위주의 정책으로 시행된다. 출산장려금이나 유급 육아휴직 등을 중심으로 한 저출산 대책도 그 예다. 반면,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에 기반한 사회가치를 만들려는 노력은 부족하다. 사회에 깊은 충격을 준 출생미등록아동 학대·살해 사건 논란도 ‘산모’가 처벌의 대상인지를 검토할 뿐, 유기된 아이나 두려움·혼란·불안을 경험했을 산모에 대한 연민과 사회적 자성의 목소리는 거의 안 들린다.

아동돌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교육이다. 최상위를 변별할 방법을 둘러싼 최근의 킬러문항 논란 이면에는 아이를 상위권에 올려놔야 한다는 부모들의 집단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살아가도록 기르는 것이 교육이라는 인식은 없다. 생존 본능이 ‘최소한 남들에게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으로 변형돼 부모들의 무의식에 자리 잡았다. 과외와 선행학습은 부모의 본능적 사랑의 발로다. 외고·자사고 폐지를 주장하는 진보 인사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도 이런 원초적 본능 말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성인 자녀가 취업과 집 마련의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도록 부모도 안간힘을 다하는 것 역시 이런 본능의 발로다.

긍정적인 가족가치를 의식적으로 확산시키지 않기 때문에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인식이 사회가치로 자연 발생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가 위험한 생존 환경’이라는 메시지가 낮은 속삭임으로 전파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출산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흥미로운 사회생물학·사회과학의 연구 대상일 것이다.

보수는 경쟁과 부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1990년대 미국을 ‘장애인의 파라다이스’로 동경하게 했던 장애인법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입법됐다. 아들 부시 대통령은 정신건강신자유위원회를 설치해 정신장애정책을 인간 중심 정책으로 전환했다. 아동정책을 개별 아동의 특성에 초점을 맞춰 가족과 국가가 협력하도록 만든 1989년 영국 아동법은 보수당 정권의 산물이었고, 아동정책의 대전환을 이룬 1990년 독일 아동·청소년지원법도 헬무트 콜 정부 때였다. 정권이 바뀌어도 보수당의 성과를 기반으로 새로운 아동정책을 발전시켜 갔다.

보수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과 자율성의 존중이다. ‘경쟁과 부’는 이런 가치의 산물이지 원천이 아니다. 지금은 인간 중심의 아동·가족정책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전한다고 인식하는 게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출생통보, 보호출산, 무상급식·보육·교육, 출산장려, 육아휴직, 아동학대 개입, 아동공공후견,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등은 모두 필요하지만, 패러다임 전환 없이는 미봉책으로 그칠 분절적 제도가 될 것이다.

아동정책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개별적·단편적으로만 접근하면 한국적인 인간 중심 가족정책은 실현되기 어렵다. 정인이 사건이 있자 묵혀 뒀던 부모징계권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삭제되고, 출생미등록 아동살해가 있자 출생통보제가 눈 깜짝할 새 입법됐다. 필요한 개별 입법이지만, 상호 연결되지 않는다면 반복되는 문제 상황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패러다임의 전환 없이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제철웅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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