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반도 장마는 사라졌나
“기후변화로 인해 한반도에서 ‘장마’의 전형적인 특성이 사라진 지 오래다.”
기자가 만난 한 기상학자는 오랫동안 사용해온 용어인 ‘장마’ 표현에 대한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장마철 지속 기간이 크게 달라졌고 국지성 폭우가 빈번해진 이유에서다. 온대 기후인 우리나라에서 동남아 아열대 기후에서 볼 수 있는 ‘스콜’과 양상이 비슷한 게릴라성 호우가 자주 내리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장마는 ‘국민의 정서’가 반영된 단어다. 장마란 오랜 기간 지속되는 비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장마백서에 따르면 장마는 15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오랜’의 한자어인 ‘장(長)’과 비를 의미하는 ‘마ㅎ’를 합성한 ‘댱마ㅎ’로 표현됐다가 1700년대 후반 ‘쟝마’로 표기됐다. 그러다가 1900년대 이후에 장마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상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장마의 개념은 장마철 정체전선의 형태로 내리는 비를 의미한다. 여름철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지역은 남쪽의 온난습윤한 공기와 북쪽의 찬 공기가 만나서 형성되는 정체전선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전선이 걸쳐 있는 지역에는 강한 남서풍으로부터 습윤한 공기의 유입량이 증가하고 장기간 많은 양의 비가 내린다. 기후학적으로 볼 때 6월 중하순경 우리나라 주변으로 상층 제트 기류가 북상해 강한 경압불안정이 형성되며, 북태평양 고기압 발달과 함께 하층 남서풍에 의해 유입되는 습윤한 공기가 모이고 올라가면서 장마가 시작된다.
그러나 이제 장마는 과학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단어가 됐다. 하루에 폭우와 폭염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장마철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기상청에서도 공식적으로 2009년부터 장마의 시작과 종료에 대한 예보는 하지 않고 있다. 장마가 시작된 이후 긴 소강상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장마가 끝난 이후에도 비가 집중적으로 내리면서 등 장마예보가 여름철 강수량에 대한 올바른 정보 역할을 못하고 있어 예보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신에 집중호우 시기 단기 특보와 더불어 장마 현상이 모두 종료된 이후 재분석해 장마의 시작과 종료에 대한 정보를 국민에게 제공한다.
학계에서는 장마 대신 우기라고 바꿔 불러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장마라는 개념이 기후변화로 인해 바뀌는 한반도의 강수 현상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다. 지난 2010년대 이후 장마철 강수량은 감소하는 추세인 데 비해 시간당 30㎜ 이상의 집중호우는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고 해수면 온도가 상승하는 등 기후변화로 강수 발생 조건이 발달해 장마철에도 집중 호우 식의 강수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점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21세기 말에 여름 강수량이 최대 25%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장마라는 한정적 개념 보다 ‘비를 내리는 기간’인 우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는 논거가 여기서 나온다. 우기는 열대나 아열대성 기후에서 발생하는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
우리는 ‘극한호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해 8월 8일 서울 집중호우 때 하루동안 내린 비가 381.5㎜였다. 올해도 예측치를 넘어서는 비가 내릴 것으로 보인다.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폭우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 충청도 등 피해 지역에 18일까지 최대 300㎜의 비가 더 내릴 것으로 관측된다. ‘극한호우’의 기준은 ‘1시간에 50㎜’와 ‘3시간에 90㎜’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는 비가 내렸을 때다. 기상청은 집중호우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재난이 잦아지자 경고 차원에서 극한호우란 용어를 썼다.
문제는 장마라고 예측되는 시기 이후에도 집중 호우가 내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예측불가능한 집중 호우를 만난다는 것은 국민에게 공포로 다가온다. ‘비 공포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있다. 통상 장마라고 불리우려면 어느정도의 ‘예측가능성’을 담보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날씨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장마가 종료됐다’고 알린다면 자칫 사람들은 집중호우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인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무쌍한 날씨에 맞는 합리적인 과학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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