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국가 안보' 앞에서도…전 같지 않은 미국

남승모 기자 2023. 7. 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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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다른 나라를 향해 칼을 휘두를 때 가장 많이 드는 명분 중 하나가 '국가 안보'입니다. 중국에 대한 첨단 기술 통제와 무역 규제 이유가 그것이었고, 최근 논란이 됐던 인플레이션 감축법, IRA의 보조금 지급 역시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IRA 보조금 지급 방식은 세계무역기구 WTO의 보조금 규정과 맞지 않지만, 미국은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라며 예외임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 때는 국가 안보를 내세워 철강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1년 내내 전쟁 중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자국 이익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는 미국이니 만큼 경제 분야가 이 정도라면 외교와 안보 분야에서 어떤 모습일 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미국에서 이런 식의 정책 추진이 가능했던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안보'에 관한 한 정치권과 국민이 한목소리를 냈기 때문입니다. 자유 민주주의에 기초한 나라로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정치 환경임에도 '국가 안보', '국익' 앞에서는 일치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온 겁니다.
 

'국가 안보' 직결, 장성 인사도 차질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랬던 미국이 지금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당장 안보의 최일선이라고 할 수 있는 군 장성 인사부터 제동이 걸렸습니다. 그간 만장일치 방식으로 일괄 처리해오던 상원 인준을 개별 심사로 전환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군 장성과 사령관 인사가 줄줄이 밀리고 있습니다. 발단은 지난 중간 선거 때 쟁점이 됐던 임신 중단 문제였습니다.

지난해 미 연방 대법원이 임신 중단권 폐지 판결을 내리자 국방부는 임신 중단을 금지하는 주에 거주하는 군인들에게 그에 필요한 여행 경비와 휴가를 지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상원 군사위 소속인 공화당 토미 튜버빌 의원이 국방부의 낙태 지원 정책 폐기를 요구하면서 지난 3월부터 군 인사 인준을 보류하고 나선 겁니다. 미국 언론들은 현재까지 250여 명의 군 인사 상원 인준이 대기 중이라고 전했습니다.

지연 여파는 일부 군 지도부 공백 사태로까지 이어져서 지난 10일 퇴임한 데이비드 버거 미 해병대 사령관의 후임이 임명되지 못했습니다. 미군 해병대 사령관이 공석이 된 것은 제5대 사령관이 임기 중 사망했던 1859년 이래 처음입니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시기에 맞춘 원활한 리더십 교체는 미국 방어와 전투력 유지에 핵심이라면서 이는 군의 준비 태세에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대사 공백 사태 우려"…국방 예산도 불투명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사진=AP, 연합뉴스)

상원 인준 차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상원 외교위 소속 공화당 랜드 폴 의원이 지난달 코로나19 기원 관련 문서 제출 등을 요구하면서 국무부 후보자의 상원 인준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현지시간 17일 정례 브리핑 이례적으로 참석해 전체 상원의원에게 국무부 후보자 인준에 대한 상당한 지연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서한을 보냈다면서 이런 지연은 국가 안보를 약화시킨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올여름 말에는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 모두 인준된 대사가 없을 전망"이라며 대사 공백이 우려가 아닌 현실임을 강조했습니다.

인사 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국방 예산과 정책을 결정하는 국방수권법안은 지난 1961년 이래 초당적으로 처리돼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2024 회계연도 법안은 여야 합의라는 오랜 관행을 깨고 하원에서 다수당인 공화당이 힘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원정 임신 중단 시술을 받는 군인에게 비용을 지원하는 국방부 정책이 폐지됐고, 성전환자를 위한 특수 치료나 다양성의 가치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에 정부 예산을 사용하는 것도 금지됐습니다. 국방수권법안은 상하 양원에서 각각 의결한 뒤 이를 병합해 단일안을 도출해야 하는데 하원에서 공화당이 당내 강경파 요구에 따라 일방적인 안을 포함시키면서 충돌이 불가피하게 됐습니다. 국방 예산이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서는 오는 9월 말까지 합의안이 의회를 통과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국제 질서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온 게 바로 '국가 안보'입니다. 임신 중단과 코로나19…. 모두 민생과 직결된 사안이지만 갈수록 양극화하고 있는 미 정치권에서 정쟁의 요소로 다뤄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정쟁적 사안이 국가 안보에까지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인 셈입니다.

선거 때마다 심화되고 있는 진영 간 정치적 양극화 속에 '국가 안보' 앞에서조차 전처럼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미국…. 군사, 경제, 첨단 기술 할 것없이 중국을 최대 경쟁자로 지목하고 견제에 올인하고 있지만, 탈냉전 이후 지켜온 미국의 세계 최강국 지위를 위협하고 있는 게 비단 중국의 추격만은 아닌 듯 보입니다.

(사진=AP, 연합뉴스)

남승모 기자 smna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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