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이 100년 넘게 사랑받는 이유
1908년 출간된 ‘빨간 머리 앤’은 한 세기가 지나서도 독자들에게 꿈의 소중함을 일러준다.
꿈 없는 삶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다. 허황된 꿈이라면 꾸지 않는 게 낫다. 꿈과 현실 간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은 쓸데없는 괴로움을 안겨준다. 그래선지 나이 들어가며 삶이란 대체로 건조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걸 부지불식간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꾸던 꿈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꿈 없는 삶이 의미 없진 않지만, 그래도 꿈꿀 수 있는 때가 윤기 있는 인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소녀였을 때,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어떤 꿈을 꿨던 걸까. 그 꿈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면 내 삶은 지금도 윤기 날 수 있을까. 그 꿈이 아직도 유효하다면 나는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 시절 읽은 책들과 주인공들이 떠올랐다. '빨간 머리 앤’의 앤 셜리는 그 꿈 많은 주인공 중 하나다.
초록 지붕 집의 앤
여기는 캐나다에 있는 에이번리라는 마을이다. 초록 지붕 집에 살고 있는 마릴라 커스버트와 매슈 커스버트는 오누이다. 이웃에 사는 린드 부인은 잘 차려입고 마차를 몰고 가는 매슈를 발견한다. 린드 부인은 곧장 초록 지붕 집으로 향했다. 마릴라는 고아원에서 나이 든 매슈의 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입양하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매슈는 기차역에서 뜻밖에도 여자아이를 만난다. 매슈는 당황했지만 일단 아이를 마차에 태웠다. 아이는 일이 잘못된 줄 몰랐다. 거대한 사과나무들이 아치를 이룬 가로수 길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말을 멈추기도 했지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인데도 매슈에게 끝없이 말을 건넸다. 그 여자아이의 이름이 앤 셜리다.
운명은 우리의 주인공 앤에게 가혹했다. 아이의 삶에 안정감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세상살이의 거친 바람을 버텨나가기에 어린아이는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 앤은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엄마, 아빠를 잃었다. 어린아이에겐 버거워 보이는 집안일을 도우며 이 집 저 집을 떠돌며 살았다. 앤을 거두었던 가난한 집들의 형편은 나빠졌고 결국 항상 뭐든지 모자라는 고아원에서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지내야 했다.
상황이 잘못 흘러가는데도 앤의 태도는 독자의 시선을 끈다. 자신이 돌려보내질 걸로 알고 있는데도 초록 지붕 집에 물이 흐르는 시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겠다는 앤의 마음은 순수했다. 슬픈 밤을 보냈는데도 아침에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앤의 마음은 대견스러웠다.
절망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현실을 바꿔줄 순 없다. 하지만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은 친절하지 않은 세상을 버텨내는 소녀의 힘이다. 그 덕분에 앤은 명랑함, 풍부한 상상력, 지치지 않고 말하는 자신만의 성격을 간직할 수 있었다. 과묵한 매슈가 앤에게 드문드문 짧게 대답하며 즐거워하는 장면은 독자의 마음에 따듯한 바람을 흘려보냈다.
마릴라는 앤을 돌려보내기 위해 앤을 소개한 집을 찾아갔다. 어릴 적 읽을 때는 앤의 안타까운 상황에 집중하느라 마릴라의 마음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집안일을 도와줄 아이를 구하던 다른 여자가 앤을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순간, 마릴라는 빠져나왔던 덫에 다시 붙잡힌 듯한 여자아이의 절망에 찬 얼굴을 봤다. 이내 마릴라는 앤을 데리고 초록 지붕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마릴라가 독자의 마음에 뜨거운 바람을 흘려보냈다. 앤을 입양하는 게 쉬운 선택일 리 없다. 늙어가는 오누이에게는 일손을 도와줄 남자아이가 절실했다. 마릴라는 고아원 출신 아이들에 대한 나쁜 소문들도 알고 있었다. 아이를 키워본 경험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릴라는 앤의 애처로운 눈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마릴라와 매슈가 앤을 받아들인 건 그가 사랑스럽고 완벽한 아이여서는 아니다. 앤에게도 여러 결점이 있었다. 앤이 생각하는 자신의 큰 결점은 빨간 머리였다. 빨간 머리는 이웃집 린드 부인과의 첫 대면을 망쳐버렸다. 린드 부인이 앤을 처음 보자마자 마르고 못생긴 데다 주근깨에 빨간 머리라고 했으니 앤이 기분 나쁜 건 당연했다. 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앤은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잡고 홍당무라고 놀린 길버트 블라이스의 머리를 석판으로 내려쳐 버렸다.
빨간 머리는 앤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단추 같은 것이었다. 앤은 빨간 머리를 없애보려고 가진 돈을 털어 집에 들른 행상에게 염색약을 샀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초록색이 된 머리를 짧게 잘라야 했다. 빨간 머리는 타고난 거라서 없앨 수 없는 거였다. 빨간 머리인 채로 행복하든 불행하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앤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앤에게 새 드레스가 필요한 걸 알아챈 건 매슈였다. 마릴라는 앤에게 퍼프소매가 없는 검소한 옷만 입혔다. 매슈는 큰맘 먹고 앤의 옷을 사러 평소 다니지 않는 가게로 갔지만 여자아이 옷을 살 용기가 나지 않아 필요 없는 것만 잔뜩 사서 돌아왔다. 이때 매슈를 도와준 게 린드 부인이었다. 린드 부인은 앤이 꿈에도 그리던 퍼프소매가 있는 드레스를 만들어주었다.
한편 앤의 빨간 머리카락을 놀린 길버트는 앤의 생명의 은인이 됐다. 앤은 친구들과 연극 놀이를 했다. 앤은 배에 누워 강을 떠내려가는 여주인공이었다. 갑자기 배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앤은 다리 아래 기둥을 붙잡고 배에서 탈출했다. 때마침 길버트가 배를 몰고 나타났다. 길버트는 앤을 구해주고 화해를 요청했다. 앤은 2년 전의 분노가 생생하게 떠올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길버트와는 좋지 않은 관계로 끝날 것 같았지만 삶은 다르게 흘러갔다. 앤은 상급학교인 퀸스 입학시험에 1등으로 합격했다. 졸업하면 교사 자격을 얻는 학교였다. 길버트와 몇 명의 아이들도 같이 퀸스 학교에 다녔다. 앤은 높은 성적으로 에이번리 장학금을 받았다. 졸업 후 레드먼드대학교에서 4년을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이었다.
그런데 매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앤과 마릴라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혼자 남은 마릴라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마릴라 혼자 농장을 꾸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앤은 장학금을 포기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릴라는 앤에게 그런 희생을 시킬 수 없다고 반대했다. 앤은 마릴라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퀸스를 졸업할 때 저의 미래는 제 앞에 곧게 뻗어 있었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많은 이정표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죠. 이제는 그 길에 모퉁이가 생겼어요. 그 모퉁이 길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하지만 가장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을 거예요."
길에 모퉁이가 나타났으니 그 모퉁이를 돌아 다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렇듯 앤은 어느새 발랄한 소녀에서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대학에 가는 대신 앤은 선생님이 되기로 결정한다. 에이번리 학교의 선생님으로는 이미 길버트가 내정되어 있었다. 앤은 멀리 떨어진 학교에 지원해야 했다. 뜻밖에 길버트가 앤을 위해 다른 학교를 지원했다. 길에서 만난 길버트는 앤에게 오래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했고 앤은 받아들였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길에는 새로 친구를 얻는 기쁨도 있었다. '빨간 머리 앤’의 모험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누구나 자신만의 '빨간 머리’가 있다
이 책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것은 한 소녀가 크고 작은 어려움을 거치며 성장하는 이야기가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일 테다. 그 감동은 무엇보다 작가 몽고메리가 한 소녀로 성장한 자신의 경험을 담뿍 담아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앤은 작가의 개인적인 삶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몽고메리는 이야기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앤이 보자마자 감탄했고 독자로서도 내내 빠져들었던 아름다운 경치를 가진 곳이다. 앤이 어려서 고아가 되어 마릴라와 매슈의 집에 살았던 것처럼, 몽고메리 역시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대학을 졸업한 후 앤처럼 선생님이 됐다. 마르고 주근깨가 있었다는 사실이나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클럽을 만든 일화 등 앤의 많은 이야기가 작가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몽고메리는 '빨간 머리 앤’에 어린 시절 우리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가득 담아놓았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고 만들어낸 놀이에 흠뻑 빠지기도 했고, 긴장과 설렘을 갖고 작지만 큰 학교라는 세계로 들어서기도 했으며, 새로운 친구를 만나 사귀고 때로는 멀어지기도 했던 시간들 말이다.
1874년에 태어난 몽고메리의 시대에 여자아이로 커간다는 건 많은 제약이 있는 일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바느질과 요리를 배우고, 여자아이다운 차림과 몸가짐을 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자랐다. 21세기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빨간 머리 앤’은 남녀 차별을 담고 있는 옛날의 이야기다.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몽고메리 역시 가부장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점에서 '빨간 머리 앤’이 좀 낡아 보인다는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닐 것 같다.
그런데도 동시에 몽고메리는 21세기의 소녀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소녀에게나 청년과 장년의 시기를 통과하는 여성 모두에게 자기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며 사는 건 여전히 소중한 일이다.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 간다는 점에서 앤은 앞서 이 기획에서 다뤘던 '제인 에어’와 많이 닮아 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생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이끌어가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빨간 머리가 있다는 것, 그런데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어느 길로 갈지 미리 알 수 없고 불현듯 모퉁이들이 나타나는 게 인생이라는 것, 그 모퉁이들을 돌아 나오는 길에서 두려워하기보다는 새로운 기대와 꿈을 조금이라도 품는 게 좋다는 것.
‘빨간 머리 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떠올린 생각들이다. 오십이 훌쩍 넘었는데도 나는 아직까지 앤처럼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꿈이 없는 삶은 이미 죽은 삶이 아닐까. 나와 같은 어른들에게도 빨간 머리 앤은 여전히 응원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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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홈페이지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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