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부 ‘책임 회피’ 일상되면 국가는 무너진다
1910년 9월10일.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의 한 저택. 중년의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막 아편을 탄 술을 스스로 먹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남자는 곁에 있던 동생에게 말했다. “세상일이 이 모양이니 선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먹기 전) 그릇에서 입을 뗀 것이 세 번이니 내가 이렇게 어리석단 말인가.”
그렇게 숨져간 사람은 매천 황현이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 독립운동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았고,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도 선정된다. 대한민국은 그를 여러 차례 기렸다.
임금에 대한 ‘충’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인’
왜일까. 강렬했던 그의 죽음이 큰 지분을 차지한다. 그는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 주권이 박탈된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난 뒤 자기 운명을 스스로 마감했다. 나라가 망한 사실에 선비의 죽음으로 항의한 것이다.
사실 황현은 대한제국 멸망에 책임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황현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 초기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었지만, 황현의 가문은 이후 유명한 관리나 대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전라남도 광양의 시골 지주 가문 정도 위상이었다. 황현은 평생 광양과 구례를 벗어나지 않았다.
관직의 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0대 중반, 그는 과거시험에 응시해 합격한다. 하지만 당시 시험관은 그의 답안지를 보고 처음에는 1위로 매겼지만 그가 시골 지주의 별 볼 일 없는 유생인 것을 알고 2위로 강등한다. 황현은 불합리한 현실에 관리 생활을 하지 않는 삶으로 대답한다. 이후 아버지의 설득으로 다시 한번 과거시험을 보지만 변하지 않은 부패상을 보고 낙향한다. 그는 지리산 자락에 조그마한 집을 스스로 짓고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회에 관심을 끊은 것은 아니었다. 황현의 실력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그는 김택영, 이건창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교류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당대 조선에서 자신이 들은 사건을 모아 <매천야록>이라는 기록을 남긴다. 풍문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명확한 역사서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시골에 은거한 선비가 서울에서 벌어진 일을 건너 들었다는 점에서 황현이 어떻게 살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들은 황현은 죽음을 준비한다. 절명시를 남기면서 그는 제 죽음이 임금에 대한 ‘충’(忠)이 아닌 사람에 대한 ‘인’(仁)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더 정확히 그는 제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하나 나라가 사대부를 길렀는데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황현의 말처럼 경술국치의 책임은 그에게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다움’(仁)이라는 가치와 사대부라는 국가 지도부 일원으로서 책임의식을 지키기 위해 자결이라는 수단을 택했다. 대한민국이 조선왕조 선비로 죽은 그를 기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태원 참사 피고인 모두 불구속 상태
매천 황현의 죽음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건, ‘책임의 무게’다. 황현은 국가의 멸망에 책임질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책임질 만한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사대부라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나라의 멸망에 책임을 졌다.
100년 뒤 대한민국에서도 이 책임의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2023년 7월6일 법원은 이태원 참사 당시 부실 대응 혐의로 구속돼 재판받는 이임재 전 서울 용산경찰서장과 송병주 전 용산서 112종합상황실장에 대해 보석을 결정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 최원준 전 용산구청 안전재난과장 등에 이어 이들도 풀려나면서 ‘이태원 참사’로 기소된 피고인 모두가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게 됐다.
법원 결정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것도, 이들이 책임지지 않았다고 하려는 것도 아니다. 한국 형법의 근간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다. 이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보석에 의한 불구속 상태의 재판이 꼭 무죄를 암시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1년이 다 돼가는 이태원 참사에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 중 누구도 ‘정치적 책임’을 지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산구 국회의원 출신인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박 구청장이 사퇴하지 않는 것에 “(박 구청장이) 형사소송이 진행되고 있어서 그걸 유죄로 예단해서 미리 물러나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정치적으로 물러날지 말지는 본인이 판단할 텐데 주변에서 물러나라 마라고 하는 것은 직권남용이 될 수도 있는 부분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정치적 책임에 소극적인 방어논리를 사용하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검찰은 ‘이태원 참사’의 주요 관련자 중 한 명인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6개월이 넘도록 기소 여부를 결론 내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159명이 사망했는데 치안 책임자가 책임져야 하는지에 국가의 공소권을 쥔 기관이 결론을 내지 못하고 미적거린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치안업무의 정무적 책임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야당을 중심으로 한 국회의 탄핵으로 업무가 정지되고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진행 중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그의 거취를 결정하지 않았다. 이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회피가 일상화가 된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이나 지도층이 한 국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책임질 수는 없다. 또한 ‘이태원 참사’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면, 결국 남는 것은 “내 책임은 아니다”라는 회피가 될 수밖에 없다. 그 회피가 일상화가 되면 국가는 결국 무너지게 된다.
매천 황현은 죽기 직전 “가을밤에 앉아 생각해보니 지식인 하기 매우 어렵다”고 토로했고, 죽음을 앞두면서 “내가 (독약이 든) 그릇에서 세 번이나 입을 뗐네”라고 말했다. 죽음을 앞두고 인간적 망설임이 엿보인다. 그가 죽음을 택한 건 강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책임의 무게’에 대한 깊은 고뇌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이도형 <세계일보> 기자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언론사 정치부에서 국회와 청와대 등을 8년간 출입한 이도형 기자가 역사 속에서 현실 정치의 교훈을 찾아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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