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탁신의 딸은 피타를 배신할까?

김원장 2023. 7.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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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밤, 태국의 젊은이들은 좌절했다. 방콕 33개 지역구 중 32개 지역구에서 승리한 전진당(MFP)의 피타 림짜른랏 대표(42)는 상하원 총리 선출 투표에서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 군부가 지명한 250명의 상원의원들은 예상대로 대부분 그에게 등을 돌렸다. 급진전을 보였던 태국의 민주화는 급정지했다.

1.군부 대 탁신

한국 국민들에게 태국 정치에 대해 가장 익숙한 단어는 ‘군부 쿠데타’와 ‘탁신’이다. 지난 20여 년간 탁신 일가의 ‘프아타이당(For the Thai)당은 총선 때마다 군부 정당에 맞서 승리했다. 하지만 군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사회가 혼란해지고 군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익숙한 시나리오가 또 개봉박두다. 그런데 주인공이 바뀌었다.

'피타 림짜른랏(42)' 전진당 대표.

‘왕실모독죄(Lese-majeste)'를 고치겠다고 했다. 100여 년 전 왕정시절에 만들어져 18번이나 헌법이 수정될 때도 살아남은 그 무서운 법.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할 이 불경한(?) 공약에 태국의 젊은이들은 투표로 화답했다. 이번 총선에서 피타의 ‘전진당(MFP)’은 제 1당이 됐다.


태국 상하원은 지난 목요일 총리 지명 투표에 돌입했다. 상원 250명, 하원 500명, 모두 750명 의원들이 한명씩 차례로 일어나 "(피타 총리에) 반대합니다", 또는 "(피타 총리에) 찬성합니다" 입장을 구두로 밝혔다. 피타는 과반 375석에 51석이 부족한 324표를 받았다. 총리 선출은 불발됐다.

군부가 지명한 상원의원 250명은 예상대로 대부분 피타에게 등을 돌렸다. 피타는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집권은 어려워졌다. (제 1당이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내각제 국가에서 늘 그렇듯) 온갖 이합집산의 시나리오가 오간다. 그중 하나는 연정에 참여한 탁신계 ‘프아타이당’의 배신이다.

2.탁신의 딸은 피타를 배신할까?

태국 유일의 전국 정당이며 지난 20여년간 태국 정치에서 여당과 야당을 오간 프아타이당. 재벌인 탁신이 만든 탁신의, 탁신에 의한, 탁신을 위한 정당이다. 2001년 ‘탁신 친나왓’이 집권했고, 군부 쿠데타로 물러났다. 2008년 탁신의 매제인 ‘솜차이 웡사왓’이, 2011년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칫나왓’이 총리가 됐지만 역시 탄핵을 당하고 쿠데타가 이어졌다.

프아타이당을 향한 태국인들의 시선은 엇갈린다. 군부에 맞선 민주 정당 아니면 부패한 재벌 정당. 실제 탁신은 집권 후 자신을 반대하는 수 많은 언론사를 폐쇄하면서 군부 정치를 답습했다. 부정부패도 만만치 않았다. 왕실모독죄 등 민감한 사회 이슈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선 탁신의 딸 ‘패통탄 친나왓(37)’이 총리 후보로 출마했다. 제 1당이 유력했지만, 국민들은 정작 선명한 개혁을 외친 ‘피타 림짜른랏’의 손을 들어줬다. 141석을 얻어 제 2당에 그친 푸어타이당은 차선으로 ‘피타’의 전진당과 연정을 꾸렸다. 하지만 피타는 상하원의 총리 선출 투표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제 누가 누구의 편이 될 것인가?

그 시나리오 중 하나는 탁신의 딸 ‘패통탄’이 군부와 손을 잡는 것이다. 쉽고 현실적인 방법이다. 군부가 지명한 상원의 몰표로 프아타이당이 내세운 후보가 총리가 된다. 왕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총선에서 전멸하다시피한 군부는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 프아타이당이 집권 여당이 되면 해외에 도피중인 ‘탁신(74)’ 전 총리도 금의환향이 가능해진다. 모두가 행복한 시나리오다. 국민만 빼고...


지난 5월 총선 직전, 이같은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패통탄은 이렇게 답했다. "여기는 태국이예요. 모든 것이 가능한 나라죠"


피타 림짜른랏(42)전진당 대표(오른쪽)와 탁신 전 총리의 딸 패통탄 친나왓(37) 프아타이당 대표. 연정을 통해 피타를 총리 후보로 내세웠지만 의회 표결에서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남은 경우의 수로 ‘패통탄’이 군부와 손을 잡는 시나리오가 계속 오르내린다. 성소수자 퍼레이드에 참석한 두 당대표. 그래서 무지개색 옷을 입었다.


3. 동남아의 늙은 호랑이 태국

태국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남아 최대 경제 대국이였다. 서쪽으로 인도를 동쪽으로 중국을 마주한 이 개방된 나라에는 해외투자는 밀려왔고, 일본 기업들은 태국에 거대한 자동차 트러스트를 구축했다. 태국은 세계 10번째 완성차 수출국이였다.

해외 투자자들은 지금은 인도네시아나 베트남으로 발길을 돌린다. 2012년 태국의 1인당 GDP는 중국에 따라잡혔다. 조만간 중국과의 1인당 GDP 격차는 2배로 벌어진다. 2억 7천 만의 자원대국 인도네시아 경제는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이웃나라 베트남은 해마다 6~7% 성장하며 올해 전체 GDP에서 말레이시아를 따라 잡고
오는 2030년에는 태국을 추월할 전망이다. 지난 2000년 베트남의 경제규모는 태국의 1/3에 불과했다.

퇴행적이며 권위적인 태국의 정치문화가 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 국민이 뽑은 하원 500명의 하원의원과 군부가 지명한 250명의 상원의원이 함께 총리 선출 투표를 한다. 세계의 어떤 저개발국가에도 이런 요상한 헌법은 없다.

빈부격차는 계속 커진다. 가구당 연평균 소득이 1만 달러(1천 3백만 원 가량) 조금 넘는 태국에서 주요 기업의 지분을 소유한 상위 500명의 연 평균 소득은 1인당 1억 200만 달러(1천 3백 억 원 가량)를 넘는다(블룸버그/태국 뿌에이 웅파꼰 경제연구소). 지친 젊은이들이 선진국처럼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 1인당 국민소득은 7천 달러인데 중위 연령이 41세다. 베트남은 32세, 캄보디아는 25세다(UN 인구피라미드 모형 참조/2020년).


4.태국의 개혁세력은 집권할 수 있을까

태국 상하원은 내일(19일) 다시 총리 선출을 시도한다. 피타가 과반을 확보해 총리가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피타는 지난 15일, “제가 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면 프아타이당의 후보에게 총리후보직을 양보하겠다”고 밝혔다. 프아타이당의 '스레타 타위신(60)' 후보가 유력하다. 그는 부동산 재벌이다. 프아타이당의 배신을 사전에 막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왕실모독죄’에 대해 침묵하는 '스레타 타위신' 후보는 피타보다 훨씬 더 많은 상원표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피타는 프아타이당과 권력을 나누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렇게 피타의 총리직과 왕실모독죄 개정은 또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 태국 네티즌들은 SNS에 '당신이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구호로 피타가 타협하지 말고 정치 개혁을 밀어 붙일 것을 주문해왔다. 하지만 현실적 타협 가능성이 높아졌다.

태국 언론 ‘카오산’의 쁘라윗 로자나프륵 주필은 지난 16일 칼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번 상하원 표결에 실망하고 있지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지만, 이제 청년들은 SNS에서 레제 마제스티의 개정을 토론한다”고 했다. 그는 또 “눈물을 흘려도 좋지만 빨리 추슬러야한다. 우리는 긴 싸움을 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태국 정치권은 부패와 쿠데타의 사슬을 끊고 미래로 나아갈수 있을까. 국민들은 총선을 통해 또다시 개혁을 요구했지만, 태국의 정치 제도는 아직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그래도 야권의 집권 가능성도, 점진적 개혁 가능성도 한층 높아졌다.

‘피타 림짜른랏’이 마주한 태국 정치의 현실을 풍자한 한 태국 네티즌의 그래픽, 출처 트위터


참고>
미얀마군부는 지난 2008년 총선 결과와 상관없이 상하원의원 의원의 25%를 군부가 직접 지명하도록 헌법을 고쳤다. 개헌을 하려면 전체 상하원 의원 75%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데, 군부가 지명한 의원이 최소 25%를 차지해 군부의 동의 없이 이 헌법은 영원히 고칠 수 없다.

상원의원 250명을 군부가 지명하는 태국의 헌법 개정(2016년)은 미얀마 군부로부터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지명된 태국의 상원의원들은 당연히 총리를 지명할 때 군부측 후보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이상한(?) 상원의원 제도는 딱 한번만 하기로 했다. 이들이 임기를 마치면, 다음 태국의 총선에서는 민의에 따라 총리가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 쿠데타가 또 일어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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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장 기자 (kim9@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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