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시럽급여’와 ‘웃는 얼굴’
영화 <기생충>은 부자와 빈자를 대표하는 두 가족을 대비시킴으로써 계층 구조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런데 영화 전반부에서 ‘가난한 가족’은 그리 비관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농담 섞은 대화를 이어가고 맥주 한 캔의 작은 사치를 즐기는 모습이 사뭇 여유롭다. 그들에게서 웃음이 싹 사라지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이 위태로운 양극화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어쩌면 웃음이다. 사소한 농담, 근거 없는 낙관주의, 별것 아닌 일에 깔깔대는 친구들, 그 짧은 시간의 충만감, 이런 것들이 있어서 이 가혹한 사회가 너무 잘 유지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난주 실업급여를 ‘시럽급여’라고 지칭한 어느 공청회 발언들로 내내 시끄러웠다. 고용센터 실업급여 담당자가 했다는 발언 내용을 듣고 한동안은 절망감이 컸다. 따라가서 봤을 리 없는 ‘해외여행’ ‘명품 선글라스’ 같은 말까지 동원해 여성과 청년 실업자를 혐오하는 저의가 의심스럽고 화가 났다.
며칠이 지나자 다른 점이 보였다. 여성과 청년들이 고용센터에 올 때 “웃는 얼굴로 온다”는 말, 특히 “이 기회에 쉬겠다고 웃으면서 온다”는 말이 곱씹을수록 좋게 들렸다. 마음이 놓였다. 사실이라면 그들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잠시 쉬고 여행도 가고 소확행도 한 뒤에는 다시 힘을 낼 수 있는, ‘회복탄력성’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온다”는 사람들이다. “장기간 근무하고 갑자기 실업을 당한 중년 남자”들이라는데, 사실 이들의 문제는 복잡하다. 숙련 체제의 붕괴, 기술에 의한 노동력 대체, 글로벌 산업 경쟁력 저하 등이 중첩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우려해야 할 것은 이들이 비관과 우울에 잠식당하는 것이다. 어떤 정책도 효과를 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자 에이미 골드스타인이 2017년 펴낸 책 <제인스빌 이야기>에 있다. 이 책은 지역의 GM 공장이 폐쇄된 2008년부터 5년간, 실업자들을 재교육·재취업시키기 위해 정부와 민간이 합심해서 벌인 노력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단언컨대 한국에서는 이제껏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없겠다 할 만큼 그들의 정책적 시도는 과감하면서도 세심했다. 그럼에도 결과는 실패, 대실패였다. 정책 대상자들은 당시의 지원을 한시적, 이례적인 것으로 여겼다. 대부분 교육 과정을 중도 이탈했고, 나쁜 일자리에 허겁지겁 빠져들거나 ‘실망 실업자’가 됐다. 심지어 지역 신문 1면에 실렸던 ‘재취업 성공자’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여기서 실패하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불안에 시달린 결과였다. 책에 수록된 설문조사를 봐도 실업 당사자와 가족 중 70% 이상이 불안과 강박을 경험했다고 한다. 불안이 모든 노력을 삼켜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실업자들이 웃는 얼굴로 고용센터에 온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정책이 효과를 내고 있다는 의미다. 그 얼마 안 되고 받기도 복잡한 돈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그들에게 화낼 이유는 없다. 그럴 시간에 ‘어두운 얼굴’로 오는 사람들을 위해 뭐라도 더 하는 편이 낫다. 분명한 건, 실업급여를 깎는다면 어두운 얼굴을 더 어둡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이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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