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88] 윈슬로 호머의 해변 풍경
파도가 흰 거품을 남기고 밀려간 자리에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들었다. 복숭앗빛 석양이 내려앉은 걸 보니 한낮 더위는 가신 모양이다. 젖은 모래에 거울처럼 비친 그림자 덕에 화면 전체가 더욱 활기차다. 그런데 시끌벅적한 무리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서 멀뚱히 서있는 여자아이가 있다. 옷과 색을 맞춘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타이즈에 부츠를 신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물놀이를 하고는 싶은데 맨발에 끈적끈적한 바닷물과 모래를 묻힌 그 다음의 뒤치다꺼리를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그저 뒷모습일 뿐인데 복잡한 그 심사가 느껴지는 건 화가 윈슬로 호머(Winslow Homer·1836~1910)의 뛰어난 묘사력 덕분이다.
호머는 19세기 말 미국의 사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나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에게 재능을 물려받았다. 판화 공방에서 일하다 잡지사에 삽화가로 취직한 뒤 남북전쟁 취재를 맡아 군인들 일상을 세밀하게 그려내면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호머는 풍경과 인물, 사건과 사물을 면밀하게 관찰해서 마치 사진처럼 그리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그의 묘사는 다만 외양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각 인물이 처한 상황에서 느끼는 미세한 감정 변화까지 담고 있다.
사실 이 그림은 더 큰 작품의 일부였는데, 한 평론가의 심한 악평을 들은 뒤 호머가 잘라낸 부분이다. 마른 붓으로 거칠게 그린 파도, 점을 찍듯 단순하게 처리한 아이들, 그에 반해 크고 또렷한 빨간 치마의 여자아이는 당시 평론가에게 영 낯설었는지, ‘눈에 보이는 대로 솔직히 그리려 했다니 어처구니없다’고 썼다. 물론 지금은 평론가의 이런 시선이 어처구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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