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7] 재가 된 예술가
8월 15일 밤에 나는 병원에서 울었다./ 너희들은 다 같은 기쁨에/ 내가 운 줄 알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일본 천황의 방송도,/ 기쁨에 넘치는 소문도,/ 내게는 곧이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하였다./ 오장환의 시 ‘병든 서울’의 첫 연이다. 오장환은 서정주, 이용악과 함께 1930년대 시단 3대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의 재능을 맨 처음 알아본 이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스승인 시인 정지용이었다. 예술성 짙던 오장환의 시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해 현실 참여적으로 변하면서도 단순한 주장에 함몰되지 않는 미적 성취가 있었다.
오장환이 태어나기 바로 전해 볼셰비키가 차르의 겨울 궁전을 함락했다.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曆)을 썼기 때문에, 양력(그레고리우스력)으로 ‘러시아 10월 대혁명’은 1917년 10월 25일이 아니라 11월 7일에 일어난 것이니, 그 일주일 뒤에 태어난 박정희는 오장환과 또래인 일제 식민지인이었다. 이런 연상을 하다 보면, 다양한 동시대인들이 역사의 불구덩이 속에서 뒤엉켜 타오르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한 시인은 월북해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했고, 한 군인은 반도의 반쪽에서 그 공산 세력과 싸우는 최고 권력자였다.
오장환에 관한 기록 속에서 이 한 줄이 ‘유독 내게는’ 영화처럼 다가와 눈시울이 젖는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의 시인 김광균을 찾아가 자신이 북에서 낸 시집을 보여주고는 돌아갔다.’ 모더니스트로서 그림 같은 시를 쓰던 김광균은 오장환의 절친이었다. 그의 첫 시집 ‘와사등(瓦斯燈)’은 1939년 오장환이 운영하던 남만서점(南蠻書店)에서 간행했다. 시인으로서 시인 친구를 가져본 사람은 안다. 세상 무엇이 둘을 갈라놓고 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들 내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오직 내 ‘시’라는 것을. 조국이고 혁명이고 나발이고 ‘그저 병든 탕아로/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한 것처럼.
아무리 미워도, 작품 열심히 잘하는 작가를 부정하지는 않던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예술가들이 갇혀 재가 되는 그 역사라는 불구덩이는 인간이 신에게 보내는 조난 신호다. 그 불빛을 따라 오늘의 우리가 여기 또 각자로서 공존한다. 광주 비엔날레와 박서보 화백 얘기를 들었다. 긴 세월 작품은 안 쓰면서 문학사 속으로 은둔하기는커녕 ‘명예롭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오명을 자초한 한 원로 소설가의 얘기도 들었다. 정치권력이 예술가를 탄압하는 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 대중이 예술가를 탄압하는 나라는 절망적이다. 그런데,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들에게 탄압당하는 나라는 ‘절망’ 그 자체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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