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진리는 대학 밖에 있다, 그러나…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2023. 7. 1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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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자기계발 바쁜 학생들, 성공의 길은 교실 밖에 있다 여겨
그러나 진리 찾는 의미를 단기간·집약적으로 알려주는 건 대학
기계적 시험과 평가의 노예 넘어, 자기탐구 경험으로 학교 지켜야
일러스트=이철원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시를 쓴다. 자신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말을 한다.”

-이오시프 브로드스키(I. Brodsky).

망명 시인 브로드스키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던 시절 얘기다. 소련 사회의 ‘기생충’으로 낙인찍혀 끝내 추방당한 시인의 학력은 중등학교 중퇴가 전부. 열다섯 살 되었을 때 레닌과 스탈린으로 도배된 학교를 뛰쳐나와 각종 노동 현장을 전전하며 책만 읽었다 한다. 독서와 실체험으로 단련된 그는 박학다식했고, 좋아하는 시인들을 번역하며 익힌 영어는 특이하고도 유려했다. 사회가 오염시키지 않은 혼자만의 눈, 세상이 들어본 적 없는 혼자만의 언어를 통해 그는 절대 되풀이하지 않고 또 되풀이될 수 없는 한 시인으로 완성되었다. 누구보다 지적인 글을 썼고, 그 글로 노벨상 타고, 명예박사 학위 받고, 명문대학에서도 가르쳤다.

한 학기 동안 진행된 시 수업 마지막 시간에 브로드스키가 말했다. ‘나는 평가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에게 A를 주겠다.’ 학생들이 환호했을까? 아니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일수록 불만이 컸고, 그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학생은 강의 평가서 작성조차 거부한 채 교실을 박차고 나갔다. 미국 명문대 학생의 몸에 밴 능력주의가 소비에트 망명 시인의 몸에 밴 탈능력주의를 이해했을 리 없다.

시인도 실은 난감했을 듯하다. 대체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평가한단 말인가? 어떤 분야에서건 평가는 가능하며 또 필요하다. 더 좋은 시와 덜 좋은 시는 분명 구분되고, 더 뛰어난 학생과 덜 뛰어난 학생도 구분된다. 그러나 그들 사이를 가르는 선이 항상 두부 자르듯 매끈하게 그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기준을 명문화하기란 더욱 힘들다. 객관화할 수 없는 영역에서 평가의 객관성을 기대하는 것은 치명적인 자기모순이고 기만이다. 그렇기에 브로드스키는 평가가 아니라 평가 ‘시스템’을 믿지 않는다고 정확히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실제로 교실 안 모두에게 A를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크나큰 세상에서 스스로를 완성시킨 사람에게는 학교 제도의 많은 것이 부질없어 보인다. 참된 교육은 학교 밖 학교에서 이루어짐을, 교육의 목적은 평가가 아니며 중요한 건 그 너머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영혼의 통이 크고 깊은 이 시인은 위대한 시 정신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학생이 칭찬받아 마땅하다 믿었을 거다.

대학의 온갖 제도에 순응해온 나 같은 사람에게도 평가는 쉬운 일이 아니며, 평가 시스템에 관해서는 갈수록 확신이 안 선다. 나의 문학 수업은 읽고, 쓰고, 토론하는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 학기 말에 성적을 내긴 하지만, 학생들과 달리 나 자신은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의외로 대학에 온 많은 학생은, 문과 전공생조차, 책 읽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입시 논술에 질려 글쓰기도 귀찮아하고, 정답이 아닐까 봐 자기 견해를 선뜻 밝히지도 않는다. 그러니 한 학기 동안 읽고, 쓰고, 말하는 일에 참여한 것만으로 모두가 A를 받을 만하다.

요즘 학생들은 온갖 스펙 쌓기와 자기 계발로 바쁘고, 인생 성공의 길은 책이나 교실 안이 아니라 밖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들 조급하고, 그래서들 지름길을 찾는다. 대학 와서도 어릴 적에 익숙해진 요점 정리와 정답을 원하며,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큰 수고 하지 않고) 대학 나온 사람의 언어와 생각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 이른바 대학 나온 사람답다고 생각되는 품새 즉 ‘교양’마저도 가령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같은 베스트셀러 한 권이면 족한 것이 현실이다.

대학 교육이 명분을 잃어간다. 오죽하면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제목의 책이 인기를 끌었겠는가. 30년도 더 전에 나온 그 책에서 저자는 ‘진리는 대학원의 상아탑이 아니라 유치원의 모래성에 있다’고 썼다. 일면 수긍되는 말이지만,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진리는 대학 밖에 있다. 그러나 진리를 찾아가는 의미를 그나마 조금 더 단시간에, 집약적으로 알려주는 길은 대학 안에 있다. 그것이 대학의 본령, 특히 AI 시대 대학이 지켜야 할 존재 이유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아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고, 기계적인 시험과 평가의 노예에서 즐거운 자기 탐구의 경험자로 해방시켜주는 길은 대학 안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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