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헌법재판소의 ‘서울 재동 백송’
소나무 종류 가운데 줄기 껍질에 흰 빛의 신비로운 얼룩 무늬를 지닌 나무가 있다. 중국이 원산지인 백송이다. 백송은 옮겨심기가 잘 안 되는 까탈스러운 나무여서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나무에 속한다. 백송은 그래서 원산지인 중국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외교관이나 중국인과의 친밀한 교유관계를 가진 권세가들의 집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권세가들이 모여 살던 수도권에 오래된 백송이 집중돼 있는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백송은 헌법재판소 경내에 서 있는 ‘서울 재동 백송’이다. 나무나이 600년, 높이 15m의 큰 나무다. 둘로 나뉜 굵은 줄기가 넓게 벌어져 큰비와 바람에 찢겨나갈 수도 있는 불안한 모습이지만, 백송 특유의 하얀 줄기 껍질만큼은 더없이 인상적이다.
‘서울 재동 백송’이 서 있는 헌법재판소 자리는 우리 근대사에서 기억해야 할 격동의 현장이다. 조선 후기 이 자리에는 형조판서 겸 한성판윤을 지낸 박규수의 살림집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킨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다.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박규수는 오경석·유흥기를 비롯해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이 집 사랑채에 모여 개화사상을 키웠다. 명실상부한 개화사상의 산실이었다는 얘기다.
갑신정변 실패 후 박규수 집터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 전신)와 창덕여고가 들어섰다가 창덕여고가 1989년 방이동으로 교사를 옮겨간 뒤인 1993년에는 헌법재판소가 자리잡았다. 법을 바르게 지키기 위한 최고 기관인 헌법재판소는 이 자리에서 대통령 탄핵 심판을 비롯한 중차대한 사건에 대해 갖가지 중요한 심판을 내렸다.
숱한 한국 근대사의 격변을 또렷이 바라보며 살아온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 뒤란에 상서로운 흰 빛으로 서 있는 오래된 백송이야말로 말하지 않으면서 가장 많은 말을 담고 서 있는 소중한 우리의 인문학적 유산이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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