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첫 ‘뺑뺑이 세대’… 1974학년도 연합고사 수험표
경기 고양시 독자 이경희(65)씨는 서울 덕성여중 3학년이었던 1973년 당시 민관식 문교부 장관의 이름을 50년 지난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했다. 명문고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그때 장관이 새 고교 입시제도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씨는 “무시험 입학이라는 발표를 들었다”고 했다. 무시험이라지만 아예 시험을 안 보는 것은 아니었다. 고교별 입학 시험을 폐지하는 대신 정부에서 고등학교 선발고사(연합고사)를 실시해 인문계 정원만큼 학생을 뽑고 추첨으로 배정하겠다는 게 새 입시 제도의 핵심이었다. 명문고 입시를 둘러싸고 사교육 과열이나 학교 서열화 같은 부작용이 계속되자 내놓은 조치였다.
이는 학군제를 바탕으로 한 고교 평준화 정책의 시작이었다. 이씨는 “새 제도를 처음으로 겪은 우리는 일명 ‘뺑뺑이 세대’라고도 불렸다”고 했다. 1974학년도 연합고사를 1973년 12월 14일 서울·부산에서 먼저 치렀고 이후 다른 지역으로 평준화가 확대됐다.
이씨는 교복 차림 사진이 붙은 그때의 수험표를 간직하고 있다. 시험은 180점 만점. 체력장이라고 불렀던 체력검사(20점 만점) 점수를 합해 총 200점 만점이었다. 배정은 추첨이었기 때문에 명문고들은 예전처럼 상위권 학생을 골라 뽑을 수 없었다. 반면 일부 비인기 학교들은 입학생의 성적이 전보다 나아지기도 했다.
학생들도 희비가 엇갈렸다. 이씨는 “담임 선생님이 학교 배정 결과를 불러줄 때 원하던 학교에 가지 못하게 돼 우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고입 선발고사는 학령 인구가 줄고 객관식 평가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돼 2018학년도 시험을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고교 평준화에 앞서 1969년 서울을 시작으로 중학교 입시가 폐지됐다. 명문중 입학은 명문고-명문대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의 첫 단추로 여겨져 어린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경쟁에 내몰렸다. 중학교 입시 문제의 복수 정답 논란이 학부모들의 시위나 법정 다툼으로 번진 1960년대 ‘무즙 파동’, ‘창칼 파동’은 당시 입시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보여준다.
교육은 대한민국이 단기간에 발전한 원동력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만연한 사교육과 ‘입시 지옥’이 있었다. 이 문제는 킬러 문항과 사교육 카르텔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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