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양보는 왜 하는 걸까?
작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로마에 사는 여행사 대표 부부와 친해졌다. 그분들이 한국에 오셨다. 즐거웠던 여행을 떠올리다 자녀 교육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어느 날 카페에서 어린 아들이 굴러다니던 돌을 두 개 주워왔다. 그녀는 “아이고, 더러워. 지저분한데 왜 그런 걸 주웠니? 당장 버려”라고 전형적인 한국 엄마처럼 대응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던 이탈리아 아저씨가 “어디서 이런 예쁜 보석을 두 개나 주워왔니?”라고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가 가지고 온 돌을 보석으로 봐준 것이다. 얼굴이 화끈해졌다고 했다.
다른 날은 아이가 놀이터에서 실로폰을 치고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아이가 치고 싶어 했다. 한국 엄마는 “너 많이 쳤으니까 이제 친구한테 양보하자”고 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이탈리아 할머니가 아이에게 오더니 질문을 했다. “너 왜 실로폰 채가 두 개인 줄 아니? 친구랑 하나씩 들고 같이 치라고 두 개인 거야.” 아이가 이해하고 친구랑 나란히 실로폰을 뚱땅거렸다. 희생보다는 함께하는 즐거움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 집 두 아이도 항상 싸운다. 집에서도 매번 “너는 오빤데 좀 양보하면 어떨까?” “오빠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면 좀 양보해”라고 설교한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이 양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아이에게 너를 희생하고 다른 사람을 살리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사람과 결혼한 친구가 자녀 양육 가치관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자기는 양보하라고 가르치는데, 남편은 이탈리아에서는 양보만 해선 살 수 없다, 오히려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고 한다는 거다.
두 가지가 떠올랐다. 어린아이를 무조건 가르치려 하지 않고 그 아이의 관점에서 봐주는 것. 아이의 판단을 존중해 준다는 것. 또 하나는 양보의 행동 너머에 있는 진짜 의미를 알려준다는 것. 양보를 왜 하는 걸까? 협력해서 잘 살기 위해서 하는 게 양보다. 회사에서도 무조건 양보하라고 하면 사달이 난다. 무조건 ‘양보’는 함께하는 ‘협력’으로 바꿀 수 있다. 오빠한테 양보하라는 대신에 “동생이랑 같이 노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라고 방향을 바꾸면 분명 결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진다. 요즘 세대에게 양보하라고 하기 전에 협력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보자. 분명 무언가 다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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