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폐광지역 리포트] 22. 사북항쟁 피해자 명예회복 위한 재심(하)
사북항쟁 무죄선고 이후 …
고 오항규·진복규·양규용·박노연 재심
재판부 “소요행위 증거 불충분 ” 무죄
첫 유족 제기 재심 무죄 판결 사례
유족·사북항쟁동지회 환호 쏟아져
국가폭력 사죄 내용없어 아쉬움 토로
또 다른 피해자 재심 청구 목소리도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43년을 기다린 무죄판결까지 걸린 시간은 30분 남짓. 이미 세상을 떠난 피고인들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사북항쟁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 13일 춘천지법 원주지원 101호 법정에는 고(故) 오항규(당시 48세)·고(故) 진복규(당시 45세)·고(故) 양규용(당시 41세)·고(故) 박노연(당시 31세) 씨 등 4명의 사북항쟁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피고인을 대신해 자리했다. 이번 재판을 함께 준비한 사북항쟁동지회 회원 10여명도 참석해 결과를 기다렸다. 오후 2시가 되자 판사들이 법정으로 들어왔고 4명의 피고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는 데까지 불과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 무죄 판결을 받기 위해 43년간 싸워왔다.
재판부는 4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사북항쟁 당시 불법집회 등 단체행동을 하거나 소요행위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으며 4명의 당사자들이 현장에는 있었으나 일부 광부들의 우발적인 폭력사태에 동참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무죄가 선고되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유가족과 사북항쟁동지회 회원의 입에서는 “드디어 무죄 판결이 나는구나”, “너무 오래 기다렸다” 등의 환호가 쏟아졌다.
사북항쟁은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원과 가족 등이 열악한 근로 환경과 어용 노조에 반발해 벌인 탄광 근로자들의 총파업 투쟁이다. 항쟁 이후 당시 제1군 계엄사령부 지휘하에 군·검·경으로 구성된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은 200여명을 구금 수사하면서 가혹한 고문 등을 일삼았다. 오항규·진복규 씨는 ‘사북 사건 합동수사단’에 의해 수사를 받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양규용·박노연 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각각 선고받아 1980년 8월 형이 확정됐다.
이번 재심은 당사자의 유가족이 신청했으며 당사자인 오항규씨는 2005년, 진복규씨는 1992년, 양규용씨는 2010년, 박노연씨는 2018년 각각 사망했다. 사북 항쟁 국가폭력 희생자인 당사자가 아닌 유족이 제기한 재심에서 무죄 선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판결이 난 이후 춘천지법 원주지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한 유가족과 사북항쟁동지회 회원들은 기쁨과 억울함의 눈물을 흘렸다. 판결을 축하하며 박수를 치거나 서로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사람도 있었다. 현장에는 지난 2015년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던 이원갑 사북항쟁동지회 명예회장도 참석했다. 이날 현장에서 만난 양규용씨의 아들 양옥현(55)씨는 “오늘 법정에서 아버지가 무죄 판결을 받는데 지금은 안 계신 아버지가 너무 생각이 났다”며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서울, 정선, 광주 등을 차도 없이 다니시던 아버지께서 하늘에서라도 이 기쁜 소식을 들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노연씨의 부인 시지연(65)씨도 “남편이 하늘에서 고맙다고 할 것 같다”며 “항상 마음의 짐처럼 가지고 있던 무죄판결을 이제야 받으니 너무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무죄판결에서 국가 폭력에 대한 사과가 없었다는 점에서 유가족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이들이 무죄 선고를 받은 이유는 ‘증거 불충분’이었다. 항쟁 주동자로 처벌받은 이원갑(당시 40세)·신경(당시 38세) 씨가 2015년 재심에서 무죄 선고받은 데 이어 2021년 황한섭(당시 41세) 씨, 지난해 강윤호(당시 33세) 씨 등도 재심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경찰과 군 검찰이 20여일간 불법구금하고 물고문과 구타로 받아낸 허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라거나 “피고인이 겪었을 그간의 고통에 대해 국가를 대신해 깊이 사죄한다”는 등 사북항쟁 피해자들이 받은 국가 폭력에 대해 인정하거나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복규씨의 딸인 진순녀(66)씨는 “아버지는 평생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시면서 사셨는데 이번 재심에서는 단순히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국가의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 이번 무죄판결을 통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인오 사북항쟁동지회장도 “앞서 세 차례의 재심 선고에서는 국가 폭력에 대한 재판부의 사과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그런 부분 없이 증거불충분이라는 사유만으로 무죄 판결이 난 부분은 매우 아쉽다”고 지적했다.
이번 무죄판결을 시작으로 사북항쟁으로 인해 기소됐던 20여명의 피해자와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에 대한 재심도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오항규씨의 아들인 오선학(67)씨는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많은 동료들도 아버지처럼 모진 고문을 받은 뒤 고통 속에 살고 계시거나 세상을 떠나셨을 텐데 이번 아버지의 무죄판결을 시작으로 많은 피해자들이 모두 무죄를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인욱 정선지역사회연구소장은 “물론 피해자나 유가족이 직접 재심 신청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원도의 또 다른 아픈 사건인 납북귀환 어부 사건처럼 사북항쟁도 국가 차원의 피해자 파악과 직권 재심 절차가 착수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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