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日 연대의 섬, 소록도③] "가해자 사과 먼저"…과거사 이렇게 풀었다
보상법 있다는 점 위안부·강제동원과 달라
'한일 민간연대' 결성해 법 개정까지 추진
"역사적 책임 인정, 과거사 해결 첫걸음"
"지난 12년 간 냉각됐던, 특히 지난 정권에서 방치되고 단절된 한일 정상 간 셔틀 외교가 복원됐다." 윤석열 정부는 자평했지만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제3자 배상 등 미완의 한일 과거사는 여전히 정치적 난제로 남았다. 어디서 답을 찾을까? <더팩트>는 한일 변호단이 매듭을 풀어낸 '소록도 한센인 소송'에서 찾기로 했다. 한일 변호단은 2006년 일본 '한센인보상법' 개정부터 2021년 한센인 가족 보상 청구까지, 달걀로 바위치기 같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으며 아직도 남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2023년 6월 다시 소록도에 모였다. <더팩트>는 이들과 일정을 함께하며 한일 과거사 문제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방향을 모색하고, 한센인을 향한 편견의 역사를 조명한다. <편집자 주>
[더팩트ㅣ소록도(전남 고흥)=박숙현·조채원·김정수 기자] '한센병 환자는 지금까지 편견과 차별 속에서 다대한 고통과 고난을 강요받았다. (중략) 비참한 사실을 후회하고 반성의 뜻을 담아서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깊이 사죄한다.'
일본 '한센인보상법(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등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전문 일부다. 일본 정부는 이를 통해 자국민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때 강제격리 정책으로 인권침해를 겪었던 한국·대만 한센인들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보상법에 따라 피해자들은 적게는 800만엔, 많게는 1400만엔까지 보상 받았다.
'한센인 강제격리'는 강제동원·위안부 문제와 무엇이 달랐기에 일본 정부의 사죄·보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결정적 차이는 관련 '법'이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한일 과거사 문제 해법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그 내용을 좀 더 들여다 보자.
◆'국가무답책' 적용 피한 '한센인 국가배상' 소송
그간 일본 사법부는 전쟁·식민지 피해에 대해 '국가무답책(國家無答策)'을 적용해 피고인 일본 정부의 보상책임을 면제했다. 국가무답책이란 '국가의 공권력, 국가의 권력 행사에 의해 개인이 손해를 입었더라도 국가는 배상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말한다. 1947년 일본 헌법과 '국가배상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전쟁 전 일본제국 헌법에서 지배적으로 적용되던 법리다.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제척 기간 문제, 한일 청구권 협정 해석 등과 함께 1990년대 후반부터 활발히 이뤄졌던 전후 보상 관련 소송이 잇따라 기각됐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한센인 소송은 '국가무답책' 적용을 피할 수 있었다. 패전 이후 위안부 제도, 강제동원의 근거가 된 국가총동원법은 사라졌지만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의 경우 1953년 새로운 나예방법에 의해 1996년까지 지속됐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한센인 단체인 '전국 한센병 환자협의회'는 정부의 강제격리 정책에 대항해 인권 투쟁을 적극적으로 이어오기도했다. 즉, 한센인보상 소송의 성격은 식민지 격리정책의 책임을 묻는 것이었지만 판결의 쟁점은 전후 피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있었다. 2001년 구마모토 법원은 1996년 폐지된 나병예방법에 따른 강제격리규정을 위헌으로 판결했다. 한센인 보상법이 제정된 것도 바로 그 해다.
일본 내 한센인 문제를 처음으로 들고나온 이는 바로 도쿠다 야스유키 변호사다. 오이타현 벳푸시의 '동네 변호사'였던 그는 1995년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보낸 이는 일본 국립 한센병요양소 입소자 시마 히로시 씨. 그는 편지에서 '나예방법과 같이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악법을 오늘날까지 존속시킨 것에 대해 인권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는 변호사회의 책임은 없는가'라고 묻고 있었다. 도쿠다 변호사는 무언가 전신을 뚫고 지나가는 전율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편지는 그가 1998년 구마모토지방재판소에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시작한 동기가 됐다.
◆국적·기간 제한 없는 한센인보상법…한일 민간 연대 빛났다
처음에 일본 자국민 대상이었던 '한센인보상법'이 한국, 대만 피해자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건 '제척기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척기간이란 법률 상 권리 존속 기간을 말하는데 통상 20년이 적용된다. 불법행위가 벌어진 시점부터 20년이 지나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한센인보상법엔 제척기간도, 법 적용에 대한 국적 조항이나 주소 요건도 없었다. 일제가 시행했던 정책에 따라 한센병 요양소에 강제로 격리됐던 사람이라면 언제라도 국적·주거지와 상관없이 보상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었다. 구니무네 나오코 변호사는 "한센인보상법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에게 적용하기 아주 좋은 법률이었다"고 평가했다.
일본 변호단은 한센인보상법이 제정된 뒤, '한국 피해자의 눈물도 닦아줘야 한다'며 2004년 소록도를 찾았다. 좌절의 순간도 있었다. 2005년 10월 25일 도쿄지방재판소가 오전 10시 한국 소록도의 '보상 청구'에는 패소, 30분 뒤 대만 낙생원엔 승소 판결한 것이다. 대만 승소 판결문에는 "(일본 피해자에게만 보상하고) 대만 피해자에게 보상하지 않는 것은 헌법 제14조의 평등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과거 국가 격리 정책에 따른 자국민 피해를 인정한 만큼 외지에서의 피해자에게도 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반면 한국 한센인 피해에 대해선 일제 나예방법 등에 따른 한센인 강제격리수용정책이 '외지'인 조선까지 미쳤단 것을 확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명백한 '차별 판결'이었다. 그러나 변호단은 꺾이지 않았다. 일본 내 보수 언론조차 사법부 판결을 규탄하고 '입법부인 국회가 결론을 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된 점을 파고들었다. 한일 변호단은 후생노동성 장관 면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항의 서신·팩스 보내기 운동, 공명당·민주당 등 일본 정관계 인사와의 면담과 설명회 등 인권 행동을 전개됐다.
일본 초당파 모임 국회의원은 '한센인 보상법 개정안'을 2006년 1월 정기국회에 의원입법으로 제출했다. 일본 변호사들은 입법 과정에서 국회의원이 "잘못된 격리 정책으로 피해자에게 사죄한다는 법 전문이 소록도에도 적용되는 것이냐"라고 질의하게 했고, 담당 장관으로부터 "그렇다"는 답변을 받았다. 사실상 소록도 한센인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 측 사죄를 받은 셈이다.
마침내 2006년, 일본 국회는 한센인 보상법 개정안을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개정안에는 '국외 한센병요양소에 입소하고 있던 사람이 종전 전에 겪은 정신적 고통을 위로하고 사례하기 위해 새롭게 국외 한센병요양소에 입소하고 있던 사람을 보상금 지급 대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문구가 신설됐다. 법률 전문에 국가가 저질렀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까지 담은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정부가 아닌 '의원 입법'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한센보상법 개정안' 전문.
'한센인들은 지금까지 편견과 차별 속에서 다대한 고통과 고난을 강요받았다. 우리나라(일본)에 있어서는 1953년에 제정된 나예방법에 있어서 계속 한센인에 대한 격리 정책이 추가됐고, 1955년대 사이까지 한센병에 대한 인식과 잘못된 명백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센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바뀌지 않고 격리정책의 변경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센인에 있어서 괴롭힘이 참기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계속 시켜왔다는 것도 경과해서 나예방법 폐지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것은 1996년에 폐지됐다. 우리들은 비참한 사실을 후회하고 반성의 뜻을 담아서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깊이 사죄함과 함께 한센인에 있던 말할 수 없는 편견을 근절하는 결의를 새롭게 한다. 여기에 한센인에 있어서의 위로와 심신의 상처를 회복하고 앞으로 생활의 평온을 할 수 있는 걸 바라며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 등이 지금까지 받아온 정치적 고통을 위자하면서 한센인에 있어서 명예 회복, 복지증진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선 추도의 뜻을 표하면서 이 법률을 제정한다.'
구니무네 변호사는 "소록도 소송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일본의 한센병 환자들, 시민단체 등이 '원고단'이라는 이름으로 전면적인 응원을 보냈고 굉장히 좋은 효과를 냈다"며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싸우는 주체가 있었다는 것이 다른 전후 보상재판과 다른 면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 변호단과 2004년부터 소록도 한센인 소송을 함께 한 박영립 변호사도 다른 과거사 문제와의 차별점에 대해 "소록도 한센인 문제와 일제강점기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일본 지식인이 있었다는 것, 구마모토 소송부터 일본 변호단이 구성돼 조직적으로 활동했다는 것, 양국 변호단과 양국 피해자·시민단체가 혼연일체가 돼 여론전을 편 것"이라며 "일본이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이 '포획됐다'고 봐야 한다"고 총평했다.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과거사 문제 해결의 '첫발'
"'끔찍한 과거가 이상하다'는 걸 분명히 하는 사회여야 합니다. 제가 한센인 가족 보상 청구에 참여하는 건 이러한 활동의 의의를 젊은 세대에게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가메이 마사테루 변호사)
도쿠다 변호사는 "일본 내 위안부에 대한 보상법이 있었다면 '한국 위안부에 보상하지 않는 건 이상하다'는 (한센인 경우와 같은) 재판도 가능했을 것"이라며 "일본 변호사들의 책임"이라며 아쉬워했다. 일본인 위안부는 가해국 국민이란 위치, 가부장적 사회분위기 탓에 스스로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일본 사회 역시 위안부를 개인적 불행으로 치부할 뿐 국가범죄로 여기지 않았다. 적극적인 보상 요구 소송으로, 보상법 제정으로 이어지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과거사 문제 해결의 시작은 '가해자가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일본 변호단이 지난 20년간 한국을 수십차례 오가며 소송을 이끈 이유는 무엇일까. 도쿠다 변호사는 스스로와 국가의 부끄러움을 씻어내기 위해서라고 덤덤히 말했다. 그는 부친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었고,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내 나라가 저지른 잘못은 곧 나의 치부"라며 "가해 국가 국민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 뿐"이라고 했다.
도쿠다 변호사는 "어떤 일이든 피해자 시점과 가해자 시점은 완전히 다르다"며 "인권 문제를 생각할 때 '가해자로서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일본 전범기업의 사죄·참여 없는 한국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인 '제3자 변제안'에 반대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도쿠다 변호사는 한일 양국에 '소록도의 경험'이 스며들길 바랐다. 일본 변호단이 소록도 한센인 문제 해결에 먼저 손을 내밀었듯 '다양한 인권침해 문제와 하나하나 맞붙어 범위를 넓혀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해자가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할 때 과거사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소록도가 보여줬다고 생각한다"며 "소록도 문제를 다룬 한일 변호단과 시민들의 소중한 경험을 양국에 조금이라도 더 넓혀 다른 과거사 문제 해결의 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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