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정조의 공간

2023. 7. 17. 23:4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연못 중심
‘천지의 이치’ 상징하는 주합루
‘군자의 도’ 형상화 부용정 조응
정조의 ‘정치 이상향’ 품은 공간

주말에 창덕궁에 갔다. 창덕궁 후원 초입, 단풍나무 숲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오르막길을 넘어서면서 나는 감탄한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자주 오는 곳인데도 내 감탄은 매번 계속된다. 놀라움에 벌어진 내 입이 미처 닫히기도 전에 발아래 펼쳐진 부용지를 중심으로 한 놀라운 공간을 마주한다.

이곳은 부용지 연못을 중심으로 동쪽만 트여 있고 나머지 방향은 모두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연못의 동쪽 평평한 땅에 잘 다듬은 석재로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우뚝한 집 영화당을 세우니 이 공간은 연못 가운데 작은 섬 속 초목이 꽃술인 양 사방으로 벌어진 한 송이 꽃이 되었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모습이었다. 정조는 이 꽃을 부용, 즉 연꽃으로 만들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1776년 3월 즉위한 정조는 즉시 연못의 북쪽 언덕에 이 층 누각을 세우라고 명하고 9월 완공을 본다. 채 6개월도 못 되는 짧은 기간에 제법 규모 있는 중층 누각을 세웠으니 지엄했던 임금의 명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누각의 이름을 ‘주합루(宙合樓)’라 하고 친히 쓴 어필에 금박을 입혀 집의 품격을 더했다. ‘주합루’에서 ‘루’는 이 층을 일컫고 ‘주합’은 육합(六合), 즉 아래와 위 그리고 동서남북을 가리키니 이는 곧 천지를 의미한다.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는 자신의 문집 ‘천장관전서’에서 주합의 뜻을 자세히 설명했다.

“규장각의 상층루가 곧 주합루로 임금이 명명한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 뜻을 모른다. (중략) 주합의 뜻은 하늘 위에 통하고 땅 아래에 이르고 사해(四海) 밖에 나아가며 천지를 뭉뚱그려서 한 뭉치로 만들고 흩으면 틈 없는 데까지 이른다.”

주합루 일 층은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시동을 걸었던 곳이니 공간의 성격으로도 창덕궁의 핵심이었다. 주합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연못의 남쪽에 두 기둥을 연못에 담그고 있는 정자가 있는데, 부용정(芙蓉亭)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숙종 때 세운 ‘택수재’란 이름의 네모난 정자가 있었다. 정조 때 이 정자를 고쳐 지으면서 이름도 ‘부용’이라 바꾸었다. 부용은 곧 연꽃의 다른 이름이니 그 이름에 걸맞게 정자의 평면을 열 십자로 하면서 전체적인 형상은 연꽃이 활짝 핀 모양으로 만들었다.

왜 이렇게 연꽃에 집착했을까? 그 이유를 창덕궁에 있는 또 다른 정자 애련정(愛蓮亭)에서 엿볼 수 있다. 숙종은 재위 18년(1692) 주합루 북쪽 언덕 너머에 있는 연못 가장자리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애련정’이라 하고 그 이유를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서 찾았다.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모란은 부귀영화에 관심 많은 당나라 사람이 좋아하는 ‘부귀화’, 국화는 도연명처럼 세속을 떠나 지내는 처사가 좋아하는 ‘은일화’, 연꽃은 군자인 자신이 좋아하는 ‘군자화’라 하였다. 그러므로 숙종 자신도 주돈이처럼 ‘군자의 덕’을 사랑하기에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한다고 하였다.

정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누구보다 ‘군자의 덕’을 추구했던 임금이었으니, 부용, 즉 연꽃을 사랑하고 이를 공간적으로 형상화하기를 바랐던 듯하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맞은 재위 19년(1795) 3월, 규장각 각신(규장각 관원)과 그 아들, 조카, 형제들을 후원으로 초청해 함께 꽃구경하고 부용지에서 낚시도 하였다. 당시 정약용은 각신이 아니었지만 글 짓느라 수고했다 하여 특별히 임금의 명으로 이날 모임에 참석하고 그 느낀 바를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로 남겼다.

“내가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높은 하늘과 낮은 땅과의 사이와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참으로 군도(君道)가 너무 높기만 하고 마음이 성실하지 않다면, 온갖 정사가 잘고 인색해지고 육기(六氣: 하늘과 땅 사이의 여섯 가지 기운)가 어그러져서 재이(災異)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올라간 것을 일러 ‘태(泰)’라고 하는데, 군자의 도는 생장하고 소인의 도는 소멸하게 되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므로 사특하고 부정한 기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성상께서는 뜻이 본디 공손하고 검소하기에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을 즐기지 않으며, 음악과 여색, 진기한 노리개를 가까이하지 않으며, 환관과 궁첩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다만, 선비나 사대부 중 문학과 경술(經術)이 있는 자를 좋아하여 그들과 함께 즐긴다. 비록 온갖 악기를 베풀어 놓고 노닌 적은 없으나, 음식을 내려주고 즐거운 낯빛으로 대해 주어서 그 친근함이 마치 한 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았으며 엄하고 강한 위풍을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가 각기 말하고자 하는 것을 숨김없이 모두 아뢰니, 혹 백성의 고통과 답답한 사정이 있어도 모두 환하게 들을 수 있었다. (중략) 이것이 이른바 군자의 도가 생장하고 소인의 도가 소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부용지를 중심으로 한 이 공간은 천지를 상징하는 주합루와 군자의 도를 나타내는 부용정이 조응하는 모양이 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이상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조가 재위 24년(1800) 49세의 나이로 갑자기 승하하니 왕이 추구했던 ‘천지의 이치’와 ‘군자의 도’는 길을 잃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은 1801년 신유박해로 18년 긴 유배 생활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다산은 유배지에서 수많은 저술에 몰두했으니, 정조가 못다 한 ‘군자의 길’을 지필묵을 벗 삼아 묵묵히 걸어간 것이리라.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