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국 생명줄' 흑해곡물협정 종료에 식량난 악몽 되살아나나
(서울=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 종료를 선언하면서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중에도 국제 곡물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 버팀목이 돼 온 이 협정이 이대로 파기될 경우 기아·식량 불안 상태에 놓인 저개발국을 중심으로 수억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7일(현지시간) AP 통신 등의 보도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흑해곡물협정의 데드라인이 이날이었다며 "불행히도 러시아 관련 사항이 이행되지 않아 오늘부터 협정이 종료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흑해곡물협정에 따른 곡물 수출은 지난 16일 우크라이나 오데사 항구를 떠난 곡물선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끊길 전망이다.
흑해곡물협정은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 선박이 흑해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고, 러시아는 농작물과 비료 수출을 보장받는 것이 골자다.
협정은 또한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공동조정센터(JCC)를 두고 곡물선이 무기 운송 등 다른 용도로 쓰이지 않는지 검사하는 등 수출입 절차 전반을 관리하도록 했다.
지난해 7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 아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이 협정을 체결하면서 농업대국인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우크라이나는 밀, 보리, 해바라기유, 옥수수 등의 주요 수출국으로 특히 전 세계 밀 수출량의 1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흑해곡물협정 덕에 급등하던 국제 식량 가격도 진정됐다. 작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우크라이나의 주요 수출경로이던 흑해 항로가 봉쇄되면서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던 국제 농산물 가격은 협정 체결 이후 전쟁 이전 수준을 되찾았다.
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에서 국제무역·경제개발을 가르치는 시몬 에버네트 교수는 AP에 "흑해협정은 여러 국가의 식량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협정은 식량 사정이 좋지 못한 개발도상국이나 국제기구의 식량원조를 받는 최빈국에 숨통을 틔워줬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더한다.
JCC에 따르면 흑해곡물협정 발효 후 우크라이나가 수출한 곡물 등 농산물은 3천290만t(톤)으로, 이 가운데 절반이 개발도상국에 수출됐다.
유엔은 흑해곡물협정으로 공급이 안정화하면서 국제 곡물 가격이 20% 이상 하락했으며 이는 이집트, 레바논 등 수입 식량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들에 큰 도움이 됐다고 보고 있다.
또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흑해곡물협정 이후 우크라이나산 농산물 72만5천t을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등 기근과 분쟁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최빈국에 구호 원조로 전달했다. 우크라이나는 WFP가 식량원조용 농산물을 조달하는 국가 중 2위에 해당한다.
구호단체 국제구조위원회(IRC)가 흑해곡물협정을 두고 "가장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놓인 79개국 3억4천900만명에게 생명줄과 같다"고 언급한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등 5개 유엔 산하 기구들이 이달 12일 발간한 식량 안보·영양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굶주림에 직면한 세계인구는 평균 7억3천500만명, 식량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는 인구는 24억명에 달한다.
흑해곡물협정이 이대로 파기될 경우 이러한 취약층이 가장 큰 위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리프 후세인 WFP 수석경제학자는 곡물협정이 재개되지 않으면 저소득 국가와 국민들이 "식량 가격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샤슈와트 사라프 IRC 동아프리카지역 비상국장은 동아프리카에서 심각한 가뭄과 홍수로 220만명분의 농작물이 파괴됐다며 이러한 위기 지역에서 식량 공급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위해 흑해곡물협정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에 복귀할지는 불투명하다.
러시아는 자국 농산물과 비료 수출 관련 사항이 이행되면 흑해곡물협정에 복귀하겠다고 여지를 남겼다. 러시아는 자국 은행 등에 대한 서방의 제재가 농산물과 비료 수출에 걸림돌이 되다며 이를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산 농산물과 비료 자체는 제재 대상이 아니며 수출도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요구는 '생트집'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러시아의 밀 수출량은 2022∼2023 무역연도에 4천550만t에 달했으며 2023∼2024년에는 사상 최대치인 4천750만t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케이틀린 웰시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국제식량식수안보프로그램 국장은 "러시아가 농업 부문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 전부터 생산과 수출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세계 식량사정을 볼모로 흑해 곡물협정과 같은 기존 합의들을 파기하겠다고 위협하는 '전투외교' 행보를 하고 있다고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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