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권리와 살 권리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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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알츠하이머'라고 진단받았을 때, 재닛 애드킨스는 54세의 영어 교사였다.
그는 "이 병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끔찍한 질병의 구렁텅이에 저와 제 가족을 함께 빠뜨리고 싶지 않습니다"는 유서를 남기고 '조력 자살'을 시도한다.
문제는 그 필연성에 전제가 되는 자아와 삶의 관점이다.
그런데 이 삶을 무가치와 끔찍함과 악몽 속에서 '사라지는 자아'의 흔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이데올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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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알츠하이머'라고 진단받았을 때, 재닛 애드킨스는 54세의 영어 교사였다. 그는 "이 병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 끔찍한 질병의 구렁텅이에 저와 제 가족을 함께 빠뜨리고 싶지 않습니다"는 유서를 남기고 '조력 자살'을 시도한다. 이렇게 그는 130여 명의 죽음을 도운 잭 키보키언의 첫 의뢰인이 되었다. '죽을 권리'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피할 수 없는 중대한 의제가 되고 있다. '조력 존엄사'라는 어색한 완곡어법으로 법 제정이 추진되는가 하면, 조력 자살을 '깊은 이해로 사려 깊게' 도운, 다른 나라 의사나 배우자의 글이 번역되기도 한다('나는 죽음을 돕는 의사입니다').
'사랑을 담아'는 65세에 치매로 판정받고, 조력 자살을 결심하는 남자와 그 과정을 '사랑으로 동행하는' 아내의 이야기다. 스위스의 디그니타스에서 남편을 떠나보내게 된 그 선택과 과정의 '필연성'을 아내가 글로 남겼다. 문제는 그 필연성에 전제가 되는 자아와 삶의 관점이다. 이 전제를 날카롭게, 깊게, 집요하게 논의하는 것이야말로 핵심 과제다.
"이를테면 나일강의 흙과 황마로 만든 아름다운 이집트 항아리는 점점 물러지고 몸체가 허물어진다. (…) 지푸라기가 한 줄기 한 줄기 뽑히듯 무너져 더는 예전의 항아리가 아니게 되고, 마침내 그 안엔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손안의 흙과 지푸라기 한 줌에 불과할 뿐."
치매인의 삶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을 강조하는 은유는 이것뿐이 아니다. 뇌의 신경세포들은 믿음직한 군대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병사'다. 새로운 개척지를 뚫을 수 없는 이 병사에겐 '퇴각'이 유일한 길이다. 퇴각의 현실적인 이유도 언급된다.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사랑 넘치고 재밌고 엉뚱하며 사탕을 잘 나눠주는 만만한 '하부지'로 기억하는 것이 브라이언과 내게는 몹시 중요하다. (…) 지금 우리가 (스위스의) 디그니타스를 찾아가지 않으면 아이들은 머지않아 그의 생이 다하는 날 슬픔과 안도를 동시에 느낄 테지만, 이 방식을 택하면 그저 슬퍼하기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애드킨스가 남긴 유서와 매우 유사한 문구도 있다. "아직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 때, 이 삶을 끝내고 싶을 뿐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점점 더 잃어가기 전에."
역시 '사라지는 자신'이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두려운 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라는 타인과 사회의 '판결' 아닐까. '자아'와 '인간다움', '존엄한 삶' 등에 관한 관념이나 규범이 지독하게 천편일률적인 사회에서 이런 결정은 자율적 선택과 폭력적인 자기 부인 사이에서 동요한다. '여전히 같은 사람입니다'에서 린 캐스틸 하퍼가 설득력 있게 주장하듯이, 죽을 권리에 관한 논의가 펼쳐지는 장의 맥락에 대한 더 포괄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치매인으로 '살고' 있는 당사자와 조력자들은 '느리고 다른 어떤 삶'에 대해 증언한다. 이 삶은 본인의 의지와 타인의 지지가 만들어내는 작은 해냄의 이어짐이다('오작동하는 뇌', '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세심하게 듣고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관계법을 익히면 된다. 그런데 이 삶을 무가치와 끔찍함과 악몽 속에서 '사라지는 자아'의 흔적으로만 해석하는 건 이데올로기다. 여기에 맞서 '살 권리'를 말하는 건 미래의 잠재적 인지장애인인 당신과 나, 모두가 방치할 수 없는 사회적 의제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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