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개입하는 평가‘시장’…시험에 의한 통치질서 바꿔야
[윤대통령 수능 논란]
[왜냐면] 신동일 |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여당이 기업에서 인정하는 토익 성적의 유효기간을 2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야당 대표도 취준생의 부담을 덜어줄 정책이라며 환영한다. 그들은 함께 토익 성적의 유효 기간을 “국민의 삶을 지키는 민생 과제”로 언급한다.
언어능력이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 현장에서 정치인의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 그걸 분주하게 전하는 미디어의 개입도 익숙한 경관이다. 큰 시험을 만들고 사용하는 의사결정에 정계나 미디어 모두 이해당사자이며 담론장에 개입할 수 있다. 다만 유력 대통령 후보가 토익 사용의 유효기간을 늘린다고 약속하고, 대통령이 돼서 공공기관뿐 아니라 사기업에게 성적 인정을 연장하라고 요청하는 모습이 웃프기도 했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정부와 여당은 이제 수능 시험에 관한 공정성 담론에 개입한다.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이 쟁점이 되고 사교육 문제와 대책이 다급하게 논의된다. 시험을 만들고 시행하는 편에서 선제적 개선이나 자성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시험의 관행에 모두 익숙한데 누가 뭘 바꾸긴 쉽지 않다. 답답하던 차에 담론장을 한 방에 흔드는 정치인들의 오지랖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어쩔지 모르겠다.
시험의 타당성을 단언할 절대적 기준은 없다. 토익 성적의 유효기간은 2년일 수만 없고, 사교육을 유발한다고 의심되는 킬러 문항도 논박될 수 있다. 그렇지만 정부가 시행기관이나 시험 사용자에게 사실상 상명하달의 당위와 지시를 주도하고 있다. 공정 담론의 효과는 차치하고 시험을 통한 능력과 성취의 추론 과정에 정치인이 과도하게 관여하고 있다.무엇보다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문제점이든 해결책이든, 시장의 기능이나 효율성의 공리가 자주 참조된다. 그것만이 통치의 원리이자 심지어 목적으로 들린다.
토익 유효기간이 5년으로 늘고 수능에 킬러 문항이 빠진다고 해도, 국가가 교육시장을 타이르고 정치도 거들며 시험정책을서둘러 바꾸는 관행에 집착한다면, 큰 시험에 의한 통치질서는 바뀌지 않는다. 시험내용과 난이도는 달라지더라도 시험결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중에 고부담, 고위험 평가사회에 관한 정치적 논의가 가려진다. 역설적이지만 정치가 시험에 개입할수록 시험담론은 탈정치화된다.
야당 대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들이 ‘필수 스펙’이 된 영어성적 비용 때문에 구직에 부담을 느끼는 일부터 없어야 한다”고 논평한 적이 있다. 청년들 배려하자면서 ‘필수 스펙’이 된 토익, 영어성적을 내기 위한 비용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팬데믹 시기에도 취준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토익을 준비하고 응시했다. 심지어 실전연습이 필요하다며 학원에서 마스크를 쓰고 말하는 연습도 했다. 시험에 의한, 시험을 위한 시장의 질서는 팬데믹도 비껴갈 만큼 당연하다.
“그런 시험이 꼭 필요할까?” 다른 교육사회를 꿈꾼다면 우리는 각자가 선 곳에서 그렇게 질문해야 한다. 토익 비용을 빼는 방안보다 토익을 그토록 여러 번 응시해야 하는 시험의 영향력에 관해 의심해야 한다. 수능의 킬러 문항에 관한 논의도 필요하겠지만 수능이 어떻게 사회정치적으로 작동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대통령도 개입할 정도면 시험의 타당성 논의는 사회정치적 단면까지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시장을 주목하며 시험정책으로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자는 접근은 권위주의 평가국가의 통치술이다. 평가국가는 앞으로도 어린 학생부터 대기업 임원까지 큰 시험을 준비하는 품행을 당연하게 요구할 것이다. 이만한 통치질서를 당장 바꿀 묘안은 없다. 그게 정말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해당사자들이 기득권력이 주도하는 담론장에서 틈을 찾아야 할 뿐이다. 가만히 있으면, 시장에 맞서든 휘둘리든, 시험에 의한 권위주의 질서는 견고하게 유지될 뿐이다. 위로부터 훈령을 전달받는 것이 징글징글하다면 시험에 관한 사회정치적 담론을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구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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