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와 대화 이어 ‘교사들과 대화’도 열릴 뻔했다
정보 중앙집적형 NEIS 도입안에
전교조 연가투쟁 등 강력히 반대
입력항목 대거 축소 타협안 마련
노 대통령 “정부 굴복시키려 해…
대통령 주재 토론회 열자” 밝혀
참모들 반대에…“한발짝씩 양보”
잘못된 일에 화내다 시간 지나면
합리적 결정 내리는 ‘노무현 스타일’
윤덕홍 장관 퇴진 등 후폭풍 거세
전교조, 그렇게 반대할 일이었나?
5월15일(목) 오후 2시 윤덕홍 교육부 장관이 찾아와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문제를 의논했다. 새로운 국가적 교육정보체제인 나이스는 전임 정부 때인 2001년 5월 전자정부 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교육부는 애초 학생인권 침해 소지와 보안문제를 들어 반대했는데, 청와대의 질책을 받고 적극 추진으로 돌아섰다. 사업비용은 서버를 교육청에 두는 통합관리 방식인 나이스 구축에 5백억원, 그 대안으로 각 학교에 서버를 두는 C/S(Client/Server)는 1500억원이 소요됐다.
전교조는 학생 신상정보 유출 위험을 들어 나이스에 반대했다(전교조는 ‘나이스’가 나이스(nice·좋은)하지 않다며 끝까지 ‘네이스’로 불렀다). 2003년 3월1일 전교조는 나이스 입력을 거부하고 분회장들이 연가투쟁에 돌입했다. 앞서 2월 국가인권위에 진정했는데, 5월12일 인권위는 전교조 손을 들어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교육부 장관과 전교조는 그해 입시는 그대로 진행하되 국가인권위 결정을 존중해 보건자료, 학사자료는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5월20일(화) 오전 9시 국무회의에서 나이스 문제 토론이 있었다. 윤덕홍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나이스 사태를 보고하면서 고3 입시에 나이스의 부분적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교조가 연가투쟁을 벌이면 처벌을 예고하고, 예고된 처벌은 집행할 수밖에 없다. 전교조가 정부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다. 징계 시 교사인력 부족을 미리 조사해두라. 인권위가 복잡한 기술적 문제에 지나치게 깊이 구체적으로 권고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국가의 합리적 의사결정을 힘으로 뒤엎으려는 기도는 용납해서는 안 된다. 현 정부는 윤덕홍 장관을 포함해 과거 사회민주화에 기여한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교사 출신 이창동 문화부 장관이 “전교조의 역사를 보면 순기능도 있다. 교장 자살 사건 이후 전교조가 조직 수호 차원에서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 정부의 지나친 대응은 금물이다”고 소신 발언했다. 이에 윤덕홍 장관은 “현 전교조 지도부는 최고 강경파들이라 대화가 잘 안 된다. 최대한 신중히 판단하겠으나 처벌은 엄정해야 한다. 입력 항목 중 벌써 100개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윤영관 외교부 장관은 “전교조가 과거 사고방식에 얽매여 반미교육을 하는 건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이창동, 지은희 여성부 장관이 반박하며 전교조를 옹호했다. 고건 총리와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은 전 정부의 무리한 전자정부 추진이 문제를 야기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전교조(지도부) 선거 공약에 나이스 폐기가 들어 있다. 다른 방법이 없다. 교육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처벌을 예고한 뒤 처벌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내렸다.
5월22일(목) 오후 2시 청와대 정책실에서 나이스 문제를 토론했다. 정책실 박백범, 박태주, 남영주 행정관과 전교조 사무처장, 김동옥 교육부 정보화기획관이 참여해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전교조는 교무, 학사, 보건항목을 삭제하고 C/S를 강화해 사용하자고 주장했다. 전교조는 이에 5년간 1천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봤지만, C/S는 보안상 문제가 있고 총비용이 2조~3조원으로 늘 수도 있었다. 게다가 C/S로 복귀에는 6개월까지 걸릴 수도 있었다.
이날 오후 5시 노 대통령의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이멜트 회장 접견에 배석했다가 나오면서 “나이스 강행 때는 일부 교사들의 입력 거부, 입시자료 중 담임교사의 주관적 평가 부문 누락 위험도 있어 타협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태연히 “괜찮습니다. 한 천명 잘라도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2001년 나이스 사업을 시작할 때 1년간 교사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아 절차상 문제가 있습니다. 노사정위원장의 중재 의사가 있으니 한번 맡겨봅시다”고 말했다.
5월23일(금) 아침 7시 주간 기조회의가 관저에서 열렸다. 문희상 비서실장, 권오규 정책수석, 정찬용 인사수석, 이병완 비서관, 이광재 국정상황실장, 서갑원 비서관이 참석했다. 노 대통령이 나이스 토론회를 주재하겠다고 하기에 “검사와의 대화도 결과는 좋았지만 사실 법무부 장관에게 맡겼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라며 내가 반대했다. 아르헨티나 출장 때문에 문희상 실장에 이어 분야별 수석회의 주재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니 노 대통령이 “회의 가거든 대통령이 나이스 토론회 하겠다고 전하시오”라고 했다.
9시15분 수석회의에서 대통령 뜻을 전하니 김희상 국방보좌관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절대 안 된다”며 강력 반대했다. 문재인 민정수석은 노사정위가 중재 노력을 하고 있으니 막후 협상을 지켜보자고 했다. 오후 2시 대통령의 나이스 토론 주재는 오전 수석회의에서 모두가 반대했다고 보고했지만,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계속 반대하자 대통령은 정색하며 “건의는 건의로 그쳐주세요”라고 선을 그었다.
5월27일(화) 오전 9시 국무회의에서 다시 나이스 토론이 있었다. 윤덕홍 장관이 C/S 복귀에 2조원이 든다고 했다. 이창동 장관은 “이 문제는 가치의 충돌이다, 교육은 철학이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합의는 다행이다. 교사들이 불편한 구체제로 돌아간 건 유감이다. ‘아무리 좋은 재판도 화해보다 못하다’는 법언이 있다. 모두 불만이지만 모두를 만족시킬 정책은 없다. 쌍방의 주장이 일리 있으나 교육계 각 세력의 힘겨루기 양상이다. 교육 당사자들을 충분히 이해시키며 추진했는지, 교육부가 합리적으로 대응했는지 의문이다. 정보의 중앙집중을 반대하는 것은 아날로그적 사고다. 보건의료 정보, 국세청 정보도 있지 않느냐. 교단의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해달라. 한발짝씩 양보하자. 장관은 심기일전하여 열심히 일하라”고 말했다. 강금실 장관은 “교단 갈등이라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입시, 고시 등 시험 위주로 사람 키우는 방식을 재고해야 한다”며 근본적, 철학적 문제제기를 했다.
역대 정부 국무회의에서 여러 장관이 이 정도로 소신 발언하고 토론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최초 아닐까. 노 대통령은 잘못된 걸 보면 불같이 화내는 격정적 성격이지만, 조금 지나면 이성을 회복해 합리적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스 때도 그랬다.
5월28일(수) 오전 9시 경제분야 수석회의에서 다시 나이스 문제를 토론했다. 김태유 과기보좌관은 전기가 처음 도입됐을 때 미국에서 반대자가 많았다고 말했다. 나이스도 새 기술이 겪는 운명인지 몰랐다. 이날 전교조는 나이스 반대 연가투쟁 돌입을 선언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국민 82~95%가 나이스에 반대했다. 학부모 14만명이 나이스 거부 서명록을 청와대에 제출했고, 추가로 40만명이 준비중이라 했다. 5백개 사회단체가 나이스에 반대했다. 학부모회와 교사단체는 진보, 보수로 의견이 갈렸다. 정부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힘겹게 싸웠다. 결국 나이스 문제는 대안인 SA, C/S, 나이스 중 자유 선택하도록 했고, 장점이 많은 나이스로 급속히 통일돼 오늘에 이르렀다.
그때 여러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러나 윤덕홍 장관은 결국 나이스 파동 때문에 장관에서 물러났다. 교육부 장관 교체 소문이 퍼지자 전교조에서 나에게 ‘장관을 바꾸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대통령에게 전하니 노 대통령은 “이제 와서 그러면 어떡합니까. 너무 늦었습니다”라고 했다. 전교조가 나이스 사태를 돌아보며 그때 너무 심하게 반대했다고 생각할지,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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