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른 퇴직 후 저질 일자리 전전… 생활고 시달리는 ‘고단한 노년’ [심층기획-실버 푸어 시대 경고음]

이희경 2023. 7. 1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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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은퇴가 초래하는 빈곤
공적연금 보장수준 턱없이 낮고… 자식 도움은 ‘언감생심’
55∼64세 취업자 34%가 비정규직
수입 중 공적연금 차지 비중 29.7%
獨 83%·濠 65%·美 64.8%과 격차
65세 이상 노인 소득 중 용돈 비중
2011년 9.5%→ 2020년 5.6% ‘뚝’
베이비붐 세대 은퇴 본격 접어들어
“기초연금·고용정책 강화해야” 지적
“빈곤은 60세부터.” 노인빈곤율이 40%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여 주는 말이다. 2년 뒤 우리나라는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산술적으로 계산했을 때, 65세 은퇴연령층 400만명가량이 빈곤에 시달린다는 말이다. 노인빈곤은 은퇴와 함께 시작된다. ‘운 좋게’ 60세를 채워 퇴직을 해도 국민연금 등 공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최대 5년을 버텨야 한다. ‘연금 보릿고개’를 버티며 고령층의 삶은 더욱 팍팍해진다. 노인빈곤 문제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대거 은퇴와 함께 절박한 현실로 다가왔다. 전문가들은 이 문제가 머지않은 미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숙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노인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선 정부 정책은 물론, 사회·경제 시스템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세계일보는 현실로 다가온 노인빈곤 문제의 원인과 전망, 해결 방안에 대해 5회에 걸쳐 짚어 본다.
 
가난은 도둑처럼 왔다.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만난 김모(65)씨는 수년 전만 해도 생활비를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음반 유통업에 40년 이상 종사했던 김씨는 한창 때 목돈도 많이 만졌다. 음반 시장이 변화하면서 생활수준은 내리막을 걷게 됐다. 사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면서 형편은 급격하게 나빠졌다. 60대에 들어선 이후부터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일자리도 얻기 힘들었다. 뇌졸중 후유증도 걸림돌이 됐다. 김씨는 “아르바이트도 60살이 넘으면 잘 써주지 않으려고 해서 일을 못 한다”면서 “예전에 인력사무소에서 용돈벌이도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잘 써주지 않고, 공공근로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초연금 32만원에 국민연금과 주거비 지원 등으로 월 74만원 정도를 받고 있다. 그는 “정말 힘들 때 자식들이 용돈 한 번씩 줘서 그걸로 입에 풀칠하고 산다”고 전했다.
김씨 사례는 노인빈곤 문제가 한 정책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사회적 과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민연금 등 노후소득 보장제도는 물론 가족부양도 기대하기 힘든 가운데 양질의 일자리마저 찾기 힘든 상황이 겹치면서 ‘빈곤의 수렁’에 빠지는 노인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노인빈곤 현상’이 이제 시작이라는 데 있다. 베이비붐 세대(1953년~1959년)의 은퇴가 본격화하면서 제대로 된 노후소득 보장 및 고용정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생활고에 시달리는 고령층이 갈수록 늘어날 것이란 지적이다.
17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발간한 ‘노인빈곤과 기초연금의 관계’ 보고서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시장소득 기준 빈곤율은 2021년 57.6%를 기록했다.

노인 10명 중 6명 가까이는 시장소득 기준으로 빈곤층이라는 뜻이다. 시장소득은 근로·사업·재산소득에 용돈 등 사적이전소득을 더한 뒤 사적이전지출을 뺀 것을 말한다. 노인빈곤율은 노인 인구 중 중위소득(한 줄로 세웠을 때 한가운데 위치한 소득)의 50% 이하인 사람의 비율을 의미한다. 2011년 빈곤율이 56.9%인 점을 감안하면 최근 10년간 노인빈곤 문제는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한 노인빈곤율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다. 가처분소득 기준 노인빈곤율은 2011년 46.5%에서 2021년 37.6%로 하락했다. 가처분소득은 시장소득에 정부가 제공하는 공적연금 등 공적이전소득을 더한 개념이다.

시장소득 기준 노인빈곤율이 악화하고 있는 반면 가처분소득 노인빈곤율이 하락하고 있는 것은 정부 지원을 제외한 상황에서 노인빈곤율이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일각에선 노인의 교육수준 및 건강수준 향상, 경제활동 확대로 빈곤이 자연스럽게 완화되기를 기대하지만, 2010년대 노인 시장소득 빈곤의 정체·악화는 이 같은 낙관적인 전망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선진국과 비교가 의미 없을 정도로 격차가 크다. 2019년 기준 한국 노인빈곤율은 4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13.5%)보다 3.2배 많은 1위였다.

◆‘이른 은퇴→불안정 노동→빈곤층 추락’

노인빈곤은 왜 지속될까. 원인은 복합적이다. 지난해 9월 OECD가 공개한 ‘한국 연금 시스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노인은 50대 초·중반 주된 직장에서 은퇴한 뒤 고용 안정성과 소득수준이 보장되지 않은 질 낮은 일자리를 전전하면서도 OECD 평균보다 늦은 나이까지 일을 하는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통계청 조사 결과 55~64세(2022년 기준) 대상 설문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에서 그만둘 당시 평균연령’은 49.3세(남자 51.2세, 여자 47.6세)였다.

OECD에 따르면 한국 55~64세 취업자 3명 중 1명(34.1%)은 소득이 낮고 고용안정성이 떨어지는 비정규직에 종사했다. OECD 평균 해당 나이대 비정규직 종사자 비율은 7.5%였다. 한국의 경우 많은 고령층이 주된 직장에서 벗어나자마자 질 낮은 고용시장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고령층이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건 국민연금 등 정부가 지급하는 복지혜택을 수령할 때까지 소득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지난해 퇴직한 김모(61)씨는 “건설 관련 경력이 제법 돼 재취업이 쉬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면서 “아이 결혼자금 등 앞으로 나갈 돈이 많은 상황에서 생활비라도 벌기 위해 편의점 자리라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등 각종 연금이 고령층 소득수준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면서 고령층 취업기간은 길어질 대로 길어진 상태다. 이른바 ‘강요된 노동’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OECD는 한국의 65~69세의 경우 49% 정도가 취업한 상태인데, 이는 OECD 평균(23%)보다 2배 이상 높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70~74세의 고용률은 37%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보장 수준 낮은 공적연금…빈곤 핵심 원인

노인빈곤율이 낮은 국가와 소득수준을 비교하면 한국 노인들의 빈곤 원인은 명확해진다. 국민연금연구원의 ‘노인빈곤 실태 및 원인 분석을 통한 정책방향 연구’에 따르면 2016년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46.93%로 호주(2014년·26.61%), 캐나다(2017년·12.57%), 독일(2018년·9.35%) 등과 격차가 컸다. 격차가 벌어진 가장 큰 원인은 소득 비중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 노인은 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 42.8%로 조사대상 9개국 중 가장 컸다. 하지만 공적연금 비중은 2016년 기준 29.7%로 호주(65.2%), 미국(64.8%)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독일(83%)과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자녀들로부터 받는 용돈 등 사적이전소득을 점점 기대하기 힘들어진 점도 문제다. 65세 이상 노인의 소득 비중 중 사적이전소득은 2011년 9.5%에서 2020년 5.6%로 감소했다. 서울 불광동에 살고 있는 이모(60)씨는 “경제도 힘든데 (자녀로부터의) 용돈은 아예 포기했다”면서 “힘들어도 내 힘으로 생계를 해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현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보장재정정책연구실장은 “현 세대 노인들은 국민연금 소득이 낮기 때문에 사적연금이나 다른 소득이 없는 분들을 중심으로 기초연금을 강화해 최소한의 노후생활이 가능하도록 해야 하고, 적정 노인일자리를 통해 소득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면서 “중장년층이나 베이비붐 세대는 국민연금 수준이 높아지는 것에 맞춰 기초연금의 역할을 축소하는 대신 자기 경력이나 기술로 경제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괜찮은 일자리를 더 만들어야 노인빈곤 문제가 완화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세종=이희경 기자, 채명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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