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의 엔딩노트 <69>] 누구도 편집할 수 없는 진실…‘살아가고, 변하고, 자란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2023. 7. 1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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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문학 작품을 분석한 글을 읽다 보면 ‘편집자적 논평’이나 ‘편집자적 관점’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가 있다. 주로 판소리 소설이나 고전소설 같은 예스러운 장르에서 접하게 되는데, 화자도 아닌 목소리가 난데없이 출현해 이렇다 저렇다 참견을 하는 것을 두고 가리키는 말이다. 소설 바깥에 있는 제삼자적 목소리(사실상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는 현대 소설에는 사라진 지 오래다. 소설 속 논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한국문학평론가협회 젊은평론가상, 현대문학상

그러나 지금 편집자적 논평은 어느 때보다 더 현대적이고 또 실제적인 존재로 부활하고 있다. 영상 시대에 편집자적 관점이란 거의 일반화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아니, 편집자적 논평과 편집자적 관점이 드러나지 않는 영상을 상상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PD의 목소리가 자막으로 깔리지 않는 영상, 나아가 연출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등장하지 않는 영상을 상상할 수 있다고? 정말로? 어림없는 소리다. 바야흐로 편집의 시대 아닌가.

직업 편집자로서, 편집자라는 말이 어느 때보다 널리 쓰이는 요즘의 현실은 종종 낯설게 느껴진다. 돌아보면 주변의 모두가 편집자인 세상. 사실상 편집자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 유튜브가 됐든 인스타그램이 됐든, 자신의 채널을 갖고 있다는 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가 자기 채널의 편집자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편집이 흔한 시대에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편집자의 윤리 같은 것 말이다.

편집자의 일을 한 줄로 요약하면 보여 줄 것과 보여 주지 않을 것을 구분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체에서 쓸모없는 부분을 잘라내고 쓸모 있는 것들만 남긴 뒤 매끈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 다시 말해 편집자는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 이야기의 결에 맞지 않는 다른 결의 이야기들을 걷어 내는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다.

출판 편집자인 내게 그런 편집의 과정은 너무나도 일상적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과정이라는 말이 편하고 쉬운 과정이라는 말과 동의어일 수는 없다. 나는 요즘 무엇을 잘라내고 무엇을 그대로 둘지 판단하는 일이 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지는 세계임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결이 맞지 않는 이야기, 전체에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란 기실 주관적인 판단이기 때문이다. 내가 맞지 않다고 생각한 부분이 실은 전체를 구성하는 다른 진실은 아닐까. 내가 삭제하려고 한 부분이 내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보지 못한 새로운 조화로움은 아닐까. 편집이라는 행위에는 언제나 불안과 회의가 잠복되어 있다. 많은 것을 편집할수록 불안과 회의 역시 많아진다.

이금이의 ‘너를 위한 B컷’은 편집당한 진실들의 반란과도 같은 소설이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 최선우가 같은 반 우등생이자 모범생 서빈이의 유튜브 채널 ‘써빈로긴’의 영상 편집을 맡게 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평범한 인성과 평범한 성적으로 그다지 눈에 띌 일 없는 최선우는 공부도 잘하고 인기도 많은 네 친구로 구성된 일명 ‘포카리스’의 일상, 즉 ‘K-중학생 시리즈’ 영상을 편집해 주며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처음 편집한 영상의 반응이 좋자 ‘써빈로긴’ 영상 편집을 전담하게 된 것인데, 편집하고 나서 받는 문화상품권도 쏠쏠하거니와 장차 자소서를 채울 이력으로도 괜찮을 것 같고, 무엇보다 영상을 편집하며 느끼는 효능감이 상당했던 탓이다.

현실의 서빈이는 선우의 편집에 따라 영상 속 인기남으로 변해 간다. 욕하는 장면들은 적재적소에 활용해 자연스럽고 친근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로 보이는 요소로 활용했고 친구들 사이 석연치 않은 분위기 역시 거리낌 없이 잘라냈다. 구독자는 점점 더 늘어갔고 서빈이의 인기 역시 날로 높아져 갔다. 편집자로서 최선우는 자신이 편집해야 할 영상의 주인공인 서빈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든다. 시간이 갈수록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두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서빈이 보내오는 영상들을 편집하는 동안 어딘가 이상한 장면들을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는다. 포카리스 멤버 중 한 명인 정후가 나머지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로 인해 자살을 시도한 적까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선우는 자신이 편집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선우는 고민 끝에 자신이 만든 영상들을 학폭 가해자 서빈이 아닌 피해자 정후의 관점으로 다시 편집하기 시작한다. ‘너를 위한 B컷’들에서 편집당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다. 주인공 선우는 소설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깨닫는다. 우리가 변하고 자라는 것이야말로 누구도 편집할 수 없는 진실이라고. 사실 이 말에서 중요한 건 변하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편집할 수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최선우는 ‘영상 편집자’라는 이 시대의 보편적 주체를 상징한다. 선우의 깨달음은 편집자로서 우리가 누구도 편집할 수 없는 진실이 화면 뒤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함을 알려준다. 우리는 언제든 우리가 잘라낸 것들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다. 자신이 편집한 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아는 것. 편집의 윤리도 여기서 시작할 것이다.

Plus Point
이금이

사진 조선일보 DB

1984년 새벗문학상에 단편동화 ‘영구랑 흑구랑’이 당선돼 작가가 됐다.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나와 조금 다를 뿐이야’ ‘망나니 공주처럼’ ‘내 이름을 불렀어’ 등의 동화와 ‘허구의 삶’ ‘알로하, 나의 엄마들’ ‘유진과 유진’ ‘벼랑’ ‘소희의 방’ ‘청춘기담’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안녕, 내 첫사랑’ 등의 청소년 소설을 썼다. 50여 권의 책을 냈지만, 아직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는 작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이가 되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2020년, 2024년 국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한국 후보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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