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상망동 주민들 “아기 덕분에 우리가 목숨 건졌다”

김현수 기자 2023. 7. 17. 16:5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4개월 영아 산사태 매몰 사고 이후
200만원 들인 배수로 공사로 피해 막아
“주민 모두 아기에게 목숨 빚진 기분”
경북 영주 상망동의 한 주택 야산 위에 17일 오전 방수포가 덮이고 임시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다. 이 지역에서는 지난달 30일 발생한 산사태로 생후 14개월 된 영아가 매몰된 바 있다. 김현수 기자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우리는 아기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나 다름없지.”

17일 오전 경북 영주 상망동의 한 주택에서 만난 마을주민 A씨가 주택 위 야산 배수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지난달 30일 빗물에 휩쓸린 토사가 주택을 덮치면서 생후 14개월 된 아기가 매몰돼 숨진 사고가 일어난 곳이다. 당시 상망동에는 173㎜ 비가 내렸다.

이 주택은 참사 당시 지붕과 벽면이 허물어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택 뒤 비탈면에는 산사태를 막기 위해 쌓은 모래주머니도 그대로였다. 사고 원인이 됐던 야산 위쪽에는 방수포가 덮여있었는데, A씨는 이 방수포에 떨어진 빗물이 장마를 대비해 만들어둔 배수로를 따라 마을 밖으로 흘러나가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배수로 덕분에 추가 산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셈이다.

A씨는 “(영아 매몰 사고 이후) 장마가 오기 전에 예방 공사를 해달라고 주민들이 많은 민원을 넣었다”면서 “닷새가 지나자 굴착기 한 대로 대충 땅을 파 배수로를 만들어 주더라”고 말했다. 이어 “그 사건(영아 사망)이 없었으면 공사라도 해줬겠나. 마을주민 모두가 아기에게 목숨을 빚진 기분”이라고 말했다. 영주시가 이 공사를 위해 지불한 비용은 200만원이다.

지난달 30일 산사태로 생후 14개월 된 영아가 매몰된 경북 영주 상망동의 한 주택이 17일 오전 참사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김현수 기자
국지성 호우 대비 선제 대응 필요
“재난 피해 발생 후에는 수습일 뿐
위험지역 파악해 대책 마련해야”

전국 각지에서 집중호우로 인한 큰 인명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재난을 대비한 선제적 예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후변화 등으로 지역별로 짧은 시간 강하게 내리는 국지성 호우가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대응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경북도 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3시 기준 예천·영주·봉화·문경지역에서 19명이 숨지고 8명이 실종됐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한 곳에서 산사태·급경사지와 관련한 선제적 안전 공사는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경북도 관계자는 “현재 사고가 난 지역에 별다른 보강 공사는 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대부분 산골지역이라 (접근이 힘든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고 말했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잦아지는 만큼 예방 대책이 선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산사태 전문가인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한국의 재난관리가 예방 중심이 아닌 피해 복구 중심이라고 했다.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해 마을 대부분이 매몰된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일대 마을에 지난 16일 토사가 밀려와 있다. 조태형 기자
구조당국이 17일 산사태로 인명피해가 크게 발생한 경북 예천 일대를 수색하고 있다. |소방청 제공

이 전 교수는 “지자체 재난관리기금의 30%는 예방에, 70%는 복구에 쓰인다”며 “이와 반대로 선진국은 70%를 예방에 쓰고 30%를 복구에 배정한다. 우리는 너무 복구 위주 대응”이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은 재난 예방사업이 끝나면 향후 10년간 일어날 확률적 손해의 16배를 막아준다고 평가하고 있다.

장마를 대비해 배수로 공사가 진행된 영주 상망동에는 지난 15일 160㎜ 비가 내렸지만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영주 풍기읍·장수면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비가 내렸는데, 이곳에서는 폭우로 인해 각각 2명 사망자가 발생했다.

현재까지 경북지역 사망자 19명 중 사망 원인이 산사태(매몰)로 파악된 경우는 12명으로, 이들 가운데 ‘산사태 취약지역’에서 발생한 경우는 2명이다. 나머지 10명은 기존에 위험지역으로 분류되지 않은 곳에 머물다 변을 당했다.

정영훈 경북대 건설방재공학과 교수는 “재난 대비는 사전에 하는 것이지 피해가 발생 뒤 하는 것은 수습일 뿐”이라며 “위험 취약지역을 파악하고 사전에 제방 건설 등 구조적인 대책과 위험을 알리고 신속히 대피할 수 있는 시스템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대비도 제대로 하지 않고 피해가 발생하면 ‘자연재해’라고 표현하는 일도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방대원과 경찰, 군 병력 등은 이날도 예천군에서 실종자들을 찾는 수색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당국은 전날 오후부터 산사태로 쓸려 내려온 가구와 차량 등이 모여 있는 곳에 실종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집중 수색 중이다.

경찰은 산사태 사고 발생 경위와 사망원인 등 사실관계를 파악에 나섰다.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점을 찾으면 즉각 수사에 나설 방침이다.

경북경찰청 관계자는 “사고 원인 확인을 위해 주민탐문과 폐쇄회로(CC)TV 분석 등 현장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