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듯 막연한 청년들의 시절, 허정혁 '봉오리 시절'[김성대의 음악노트]
트렌드의 '최신'과 차트 성적의 '최고'에 숨막힐 때 가끔은 숨통을 트게 하는 '자연주의' 음악을 찾게 된다. 느리고 평화로운 것들을 잊은 채 뭔가를 바삐 하지 않으면 불안한 현대인들. 쉴 줄 모르고 놀 줄 모르는 그런 우리에게 허정혁의 음악은 그럼에도 빈둥빈둥 보내는 하루를 한 번쯤은 제대로 가져보자 말하는 것 같다. 연둣빛 멜로디로 엮여 나풀나풀 날아가는 음악 속에 일상의 피로가 백기를 든다. '봉오리 시절'의 첫인상이다.
앨범 '봉오리 시절'은 17초짜리 소품 '시절과 시절'로 문을 연다. 가사는 "겹겹의 세계를 느리게 헤매다가"가 전부다. 이는 "라랄라" 약간의 흥겨운 템포를 지닌 '베짱이' 정도만 빼면 이 음반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천천히 조금씩'이라는 노래의 제목이 일단 그렇거니와 20대라는 "겹겹의 세계"를 막 지나온 30대 청년의 "느리게 헤매"는 대부분 노래들성향이 또한 그렇다. 특히 창가에서 상념에 빠진 순간을 묘사한 '창가에 앉아'의 보컬 멜로디는 허정혁의 음악이 포크의 자장에만 머물지 않고 팝의 영역까지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낸다.
반짝반짝 기타 줄을 뜯어나가는 '풍선'은 결국엔 바람 한 점으로 소멸할 욕심의 덧없음을 노래하는데 이는 오래전 바람의 자유, 자유의 바람을 노래한 한대수가 지금 세대와 공명하는 것처럼 나에겐 들렸다. 예민과 권나무가 스치는 '놀이터'도 그렇고, 당장 음악만 들으면 동요의 풋풋함에 모던 포크의 느슨함으로 와닿지만 정작 허정혁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는 듯 보였다. 그건 어쩌면 시대와 세대, 나아가 인생의 문제까지 가야 하는 문제였다. 그는 앨범 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삶의 한복판에서 흔들거리면서도 걷고 싶은 열망이, 생을 끌어안으며 몸부림을 치던 것이 노래가 되어 남았다."
그러니까 앨범 '봉오리 시절'은 '꼰대'라는 이름으로 빈축을 사곤 하는 기성 세대의 몰이해와 오해의 함정에 빠진 MZ세대의 점잖은 반격에 가깝다. "끝내 피우지 못한 채로 져버리면 어쩌나" 싶은 봉오리를 앨범 제목에 쓴 것부터가 이미 그런 반격의 서막이다. 즉 봄 기운으로 생동하는 날과 그 기운이 꺾여 풀 죽은 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상의 더께가 바로 '봉오리 시절'인 셈이다. 편곡이 돋보이는 수록곡들 제목을 엮어본다면 그것은 "계절 따라 어디론가" 떠나 만나려는 "새로운 길"의 여정일지도 모르겠다. '있어요'라는 곡이 전하는 분위기 있는 좌절, 살아지는 만큼 하루씩 살아가겠다는 '천천히 조금씩'에서 밝힌 차분한 각오 역시도 다 그 반격의 파편들일 터다.
감정의 과잉을 지양하고 음악적 표현을 지향하기 위해 최소한으로만 만진 편곡. 그리고 담담히 흘러가는 기타 소리와 가수의 목소리.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앨범을 만든 이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이란 것이, 시인과 촌장을 따라 지었다는 포크 듀오 시옷과 바람의 멤버란 사실이, 조금은 비린 '자연주의' 음악의 동지일지도 모를 천용성의 '수몰'에 참여했다는 이력이, 따뜻한 우울함을 공유하는 김해원이 프로듀싱부터 앨범 여기저기에 참여했다는 부분 모두가 허정혁이 어떤 뮤지션인가를 말해줄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 그의 음악에서 보이는 삶과 사회를 관조하는 시선, 절망과 희망의 같은 무게감, 공허한 고독 안에서 질식하는 독백('수풀'을 들어보라)이 다 그런 뮤지션 허정혁의 본질인 것이다. 둥글면서 뾰족한 사유와 불안해도 서글서글한 스트로크/아르페지오로 향기로운 전쟁을 치러내는 그의 멜로디 시는 휴식, 추억, 자조, 위로의 노래들로 그렇게 조용히 번민한다.
중년 같은 청년의 노래들이 끝나고 노랫말이 없는 '먼 바깥'을 한 번 더 듣는다. '놀이터'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른 알 수 없던 감정이 울컥 눈물이 되려 하는 건 아마도 이 음반이 진심이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같은 자리, 굴레를 벗지 못한 '누군가의 노래'. 반격의 소소한 감격을 바라고 있었을 그 노래 속엔 혹 우리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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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약력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마이데일리 고정필진
웹진 음악취향y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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