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제조업 피땀 무시하는 사모펀드, 이대로 좋은가

원종태 기자 2023. 7. 1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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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원종태 기자 = 세상사는 돌고 돈다. 비슷한 일이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때가 종종 있다.

2006년 8월 23일. 당시 고려대 경영대학장이었던 장하성 교수(전 대통령실 정책실장, 전 중국대사)는 난데 없이 사모펀드를 하겠다고 나섰다. 바로 라자드한국기업지배구조재선펀드(LKCGF Lazard Korea Corporate Governance Fund)다.

소액주주 운동과 참여연대, 그리고 장하성 펀드
장 교수는 참여연대에서 소액주주 운동으로 이름을 높였던 인물이다. 장 교수가 주도한 이 펀드는 정식 명칭보다 '장하성 펀드'로 불렸다. 이 펀드를 운영했던 펀드매니저가 존 리다.

둘은 의기투합 했다. 존 리가 기업을 선별해 주식을 매집하면, 장 교수는 해당 기업의 지배구조를 어떻게 개선하라고 명분을 내는 식이었다.

당시 증권가 기자들 사이에서 장하성 펀드의 존재감은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하성 펀드가 매입했다고 공시하면 해당 주식은 곧바로 상한가로 치솟을 정도였다. 그렇게 장하성 펀드는 태광산업, 대한화섬, 화성산업, 크라운제과, 동원개발, 대한제당, 신도리코에 이르기까지 기업 주식들을 잇따라 매집했다.

장 교수는 장하성 펀드 출범 초기에 "우리 펀드를 단기간에 평가하려 들지 말고 좀 장기적 관점에서 지켜봐 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참여연대 내부에서조차 순수하게 소액주주 운동을 하던 장 교수가 사익을 추구하는 사모펀드에 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반대가 있었다.

참여연대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이었던 김상조 교수(전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006년 9월 언론과 인터뷰에서 "(장하성 펀드가) 2년 정도 지나면 어느 정도 펀드에 대한 평가가 나올 것이다"며 "돈도 벌 수 있고, 지배구조도 바꿀 수 있다는 모델을 보여주려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세월이 흘러 이 둘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디스커버리 사모펀드'에도 함께 투자하니 남다른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장 교수는 장하성 펀드로 한국 기업 지배구조를 의미있게 바꿀 것이라고 역설했지만 정작 바뀐 것은 없었다.

장하성 펀드는 출범 3년차인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원금의 40%를 넘는 손실을 봤다. 2011년에는 또 다시 20% 가까운 손실을 냈다. 급기야 펀드 운영 만기인 2012년 장하성 펀드는 모든 보유 주식을 매각하고 청산 절차를 밟는다.

장하성 펀드가 5년 만에 청산된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당시 불황기에 건설주에 투자한 것이 결정적인 수익률 저하를 불렀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기업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을 무리하게 요구한 것이 자충수가 됐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단적으로 장하성 펀드는 당시 벽산건설 최대주주인 ㈜인희 측에 벽산건설 보유 주식 20%를 무상 소각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멀쩡한 주식을 태워 없애라는 것을 받아들일 기업은 없었다. 이 때문에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분만 내세웠을 뿐 기업들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의욕만 넘쳤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강성부 펀드의 명분, 지배구조 개선 '코스프레'
한때 존 리가 대표로 있던 메리츠자산운용이 KCGI자산운용으로 넘어갔다. KCGI(Korea Corporate Governance Improvement)는 강성부 대표가 만든 자산운용사로 최근 메리츠자산운용 인수를 위한 금융위원회 승인까지 끝냈다.

KCGI의 펀드들은 장하성 펀드처럼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행동주의 펀드들인데 일명 '강성부 펀드'로 불린다.

강성부 펀드의 투자 행보는 장하성 펀드와 다를 게 없다. 주식을 매집한 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경영진을 압박한다. 이 과정에서 주가가 오르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주식을 팔고 떠난다.

강성부 펀드의 수법은 장하성 펀드보다 더 노골적이고, 더 낯 두꺼워졌다.

경영진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면 자신들이 비판하던 인물과도 대놓고 손을 맞잡는다.

강성부 펀드는 2018년 11월 대한항공 지주회사 격인 한진칼 주식 9% 보유 사실을 공표하며 한진그룹 오너 일가에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후 1년여만에 오너 일가 중 한 명인 조현아 전 부사장과 손을 맞잡고 조원태 회장을 압박했다.

2019년 4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별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기업이 창업주를 잃고,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강성부 펀드는 누나와 동생 사이의 벌어진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급소를 찔렀다. 그렇게 강성부 펀드와 조현아 전 부사장, 반도건설은 3자 연합을 구성했다.

이런 자기모순은 강성부 펀드의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스스로 잘 보여준다.

자신들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는 게 강성부 펀드의 민낯이다. 하지만 강성부 펀드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3자 연합은 결성한 지 1년 4개월만인 2021년 3월 해체된다.

강성부 펀드는 이때 진퇴양난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호반건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진칼 주식을 5640억원에 모두 매입하겠다고 나서며 강성부 펀드는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기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시 강성부 펀드의 시세 차익은 81%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성부 펀드는 한진그룹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하는 등 장기 성장을 위한 준비를 마친 만큼 투자 회수에 나섰다는 간지러운 변명을 내놓았다.

강성부 펀드는 지난 1월에는 오스템임플란트 주식을 매입해 예의 사모펀드 특유의 사악함을 보여줬다.

오스템임플란트가 대규모 횡령사건으로 내부 통제와 지배구조 문제가 불거지자 강성부 펀드가 이 틈을 놓지 않고 최규옥 회장 퇴진을 요구하며 목을 조른 것이다. 이에 최 회장은 아예 제3의 사모펀드에 기업을 매각하겠다는 초강수를 둔다. 강성부 펀드의 기업 흔들기가 급기야 평생을 일군 중견기업 매각으로 치달은 것이다.

강성부 펀드는 역시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입장과 전혀 다른 제3의 사모펀드에게 보유 주식을 모두 팔고, 역시 만만치 않은 시세차익을 챙긴 뒤 쏙 빠져나간다. 오스템임플란트 역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사익을 챙기기 위한 허울 좋은 구실이었을 뿐이다.

사모펀드에 당하기만 하는 전통 제조 기업들
강성부 펀드는 최근 반도체 기업인 DB하이텍까지 흔들고 있다.

DB하이텍은 1997년 설립된 동부전자가 전신으로 2001년 국내 최초로 비메모리반도체 파운드리 사업에 진출한 반도체 기업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 경험이 전무했던 시절, 동부전자는 누적 적자가 3조원까지 불어나는 존폐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김준기 창업회장이 사재 3500억원을 출연했고, 전 직원이 힘을 합쳐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그렇게 임직원들의 노력 속에 동부전자는 반도체 사업 13년 만인 2014년 흑자 전환에 성공한다. 이후 DB하이텍으로 사명을 바꾸고 지난해 매출 1조6753억원, 영업이익 7693억원, 영업이익률 46%를 달성하며 알짜 기업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시작된 반도체 불황으로 DB하이텍은 공장 가동률이 70%로 주저 앉았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강성부 펀드가 또 다시 위기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지난 3월 말 강성부 펀드는 DB하이텍 지분 7.05%를 확보했다고 공시하며 또 다시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며 DB하이텍을 압박했다.

회사의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도 힘든 시점인데 강성부 펀드는 아랑곳 하지 않고 DB하이텍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강성부 펀드는 오너 일가들을 직접 공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DB하이텍 지분 매입 후에도 특유의 레퍼토리인 김준기 창업회장 퇴진부터 요구하고 나섰다.

가뜩이나 반도체 불황으로 고전하고 있는 DB하이텍은 회계장부와 이사회 회의록 공개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강성부 펀드에 대응하기 위해 불필요한 비용과 인력을 쏟아붓고 있다.

특히 DB하이텍의 고객사 입장에선 강성부 펀드와의 이 같은 갈등은 불안감을 야기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결국 수주 감소로 이어져 DB하이텍의 본질적 가치에 좋을 게 없다. 강성부 펀드가 DB하이텍 주식을 매집했다고 공표하기 전까지 30%에 가까웠던 외국인 투자자 지분은 현재 18%로 낮아졌다.

전 직원의 피와 땀으로 만든 성과를 폄훼하고, 오직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핑계를 내세워 경영권 분쟁을 촉발하고, 창업주 퇴진을 촉구하는 강성부 펀드는 사악한 자본의 민낯 그 자체다.

사익 추구 사모펀드 '카르텔', 이대로 좋은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카르텔'이라는 단어는 부패한 이권을 총칭한다. 이 카르텔은 여의도로 대변되는 증권가의 그늘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 오직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제조 기업들을 압박하는 행동주의 펀드들.

국가 기간산업으로 불리는 항공 산업과 반도체 산업까지 이 행동주의 펀드들에게는 너무 쉬운 먹잇감이 되고 있다. 국가 기간산업은 돈에 의해 농락 당해선 안될 국가 경쟁력의 핵심 산업이다.

강성부 펀드는 어디까지나 사모펀드로 개개인의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본질이다. 결국 강성부 펀드가 중시하는 것은 멀쩡한 기업을 압박하고, 이슈화 해 자신들의 개인 고객들을 위해 시세차익을 챙겨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고 행동주의 펀드 전체를 '악의 꽃'으로 몰고 갈 의도는 없다. 하지만 경영 참여 목적으로 기업주식을 일정 부분 이상 취득한 경우 반드시 6개월 이상 의무 보유기간을 부여하는 등 행동주의 펀드를 감시하는 기능은 부활돼야 한다고 본다. 도대체 이런 기본적인 안전핀을 누가 무슨 이유로 제거해줬는지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기업의 잘못된 지배구조를 감시하겠다고 입 발린 소리를 하지만 정작 그들을 감시할 주체는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이 엄청난 머니게임에서 우리 제조 기업이, 주주가, 언론이 능멸 당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돈은 색깔이 없어 더 냉혹하다고 한다. 그러나 강성부 펀드의 돈은 왠지 색깔이 너무 분명해보인다. 전 직원들이 피땀으로 일군 기업들이 이런 사모펀드에 의해 결딴 나는 현상을 우리는 언제까지 '자본주의'라는 미명 아래 지켜봐야 하는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사모펀드가 과연 한국 경제에 무슨 순기능을 하는지 따져봐야 할 때다.

☞공감언론 뉴시스 w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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