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물가 2%대인데…금리 인상에도 英·EU 물가 왜 안 잡힐까
ECB “임금發 인플레 이제 시작…금리 더 올릴 것”
유로존 6월 물가상승률 5.5% vs 한국은 2.7%
韓 에너지 가격 안정 기저효과 크게 작용
“전기료 인상 눌러 한전이 대규모 적자로 떠안은 측면도”
“기준금리 인상을 멈추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최근 포르투갈에서 열린 ECB 주최 통화정책 포럼에서 이같이 말했다. ECB가 지난해부터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물가 상승 압력이 여전히 높기 때문에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라가르드 총재는 설명했다.
실제 유로존의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5.5%로 전월(6.1%)보다는 하락했지만, 여전히 ECB의 물가 목표치(2%)를 크게 웃돌고 있다. 유로존만 고물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다. 영국, 호주 등 선진국들도 지난달 물가상승률이 5~6%대에 육박했다. 지난해 고점과 비교하면 낮아졌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반면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은 지난달 2.7%를 기록했다. 21개월 만에 2%대로 내려오면서 고물가 공포에서는 일단 벗어났다는 평가다. 한국은행도 물가 둔화 흐름을 반영해 이달 기준금리를 연 3.5%로 4연속 동결했다. 수치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이 주요국 중 가장 낮은 편인데, 물가가 빨리 안정세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 고물가 벗어나지 못한 영국·캐나다…금리 인상 지속
17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OECD 38개국의 물가상승률은 평균 6.5%를 기록했다.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스위스(2.2%), 그리스(2.8%) 덴마크(2.9%), 일본(3.2%), 스페인(3.2%) 등에 이어 6번째로 낮았다.
우리나라 물가상승률은 6월에 2.7%로 더 떨어졌고, 대부분 국가도 인플레이션(지속적인 물가 상승)이 서서히 둔화하는 추세다.
그러나 물가 수준과 하락 속도는 국가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5월 물가상승률이 8.7%로 전월 수준을 유지했다. 시장 예상치를 웃도는 물가 지표에 놀란 영국 중앙은행은 다음날 기준금리를 연 5.0%로 0.5%포인트 전격 인상했다. 유럽연합(EU)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의 경우 6월 물가상승률(예비치)이 6.4%로 전월(6.1%)보다 더 상승했다.
캐나다는 5월 물가상승률이 3.4%로 떨어졌지만, 캐나다 중앙은행은 하락세가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난 12일(현지 시각) 기준금리를 연 5%로 0.25%포인트 올렸다. 캐나다 중앙은행은 물가상승률이 연내 목표 수준(2%)에 도달하지 못하고 내년까지 3%대에 머물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치솟았던 에너지 가격이 올 들어 하락한 데다, 지난 2년간의 금리 인상의 효과가 시차를 두고 나타나면서 물가상승률도 2%대로 내려왔다는 게 정부와 경제학계의 분석이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 안정과 가파른 금리 인상은 다른 국가들도 공통적으로 겪었기 때문에 두 요인만으로는 국가별 물가상승률의 차이를 설명하긴 어렵다.
◇ 임금發 물가 상승 직면한 유럽…한전이 적자로 떠안은 韓 에너지 가격
시장 전문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유럽 주요국의 물가상승률이 여전히 높은 이유로 서비스물가 급등을 꼽았다. 유럽에서는 엔데믹(endemic·풍토병으로 굳어진 감염병) 이후 외출과 모임, 여행 등을 중심으로 소비가 늘면서 외식물가를 포함한 서비스 물가가 큰 폭 상승했다. 지난달 유로존 소비자물가지수(CPI) 중 식료품·주류·담배 물가는 11.7% 뛰었고, 공업제품 물가도 5.4% 상승했다.
치솟는 인건비도 유로존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는 요인이다. 올해 1분기 유로존의 임금 상승률은 4.3%로, 지난해 연간 기준 우리나라 임금 상승률(3.8%)보다 높았다.
라가르드 총재도 임금발(發)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공급 충격이 물가 상승을 주도하는 인플레이션의 초기 단계는 지났고, 임금 인상이 기업의 비용과 제품 가격을 밀어올리는 2차 파급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ECB에 따르면 유로존 인건비는 2025년까지 약 14% 오를 것으로 추정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인플레이션이 둔화하고 있지만,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것이 가장 힘들 것”이라며 “에너지발 물가 상승은 끝나가고 있지만 임금 상승률이 아직 물가에 어떻게 반영될지가 관건”이라고 전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 주요국은 올 들어 에너지 가격 하락에 따른 기저효과도 크게 누리지 못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과거 유럽 주요국은 러시아에서 천연가스를 수입해서 썼는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무기화한 뒤로 미국이나 호주에서 천연가스를 유조선 등을 통해 공급받기 시작했다”며 “지난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천연가스 가격이 올 들어 하락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 유럽 주요국의 전기요금이 상승세를 이어갔고, 천연가스 발전에 의존하는 독일 등은 급증한 생산 비용을 공업제품 가격에 전가하면서 물가가 계속 오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유로존의 물가상승률 중 에너지 가격은 6월에 5.6% 내렸는데, 같은 기간 우리나라 석유류 가격이 25.4% 떨어진 것과 비교하면 하락폭이 크지 않다.
이밖에 우리나라는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기간 치솟은 에너지 가격의 상당 부분을 한국전력이 막대한 적자로 떠안고 있어 물가에 덜 반영된 측면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생산비용이 전기요금 등에 곧바로 반영되는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정부가 공공요금을 결정하는 구조라 어느 정도 물가 안정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다.
지난해 에너지 가격 상승에도 전기요금 인상이 억제되면서 한국전력은 구매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전기를 팔았고, 그 결과 지난해 연간으로 33조원에 육박하는 영업손실을 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에너지 가격 상승을 한국전력이 적자로 떠안고 있는데 이 부분이 물가 지표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정부가 하반기에 공공요금 인상에 돌입할 경우 우리나라 물가상승률도 다시 3% 안팎으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3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물가상승률이 둔화되고 있지만, 8월 이후에는 3% 내외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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