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을지OB베어···내쫓긴 주민 곁엔 ‘흰 머리 그’가 있었다
“폭력 쓰지 맙시다. 욕도, 반말도 하지 맙시다. 질긴 놈이 이깁니다.”
강제집행 용역업체 직원 100여명 앞에 선 김종일 을지OB베어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위원장(65)은 42년간 서울 중구 노가리골목을 지켜온 호프집 을지 OB베어를 지켰다. 이 때문에 지난달 14일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지난해 2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그는 언어장애 판정을 받은 터였다. 16개월간 입원했다가 지난달 퇴원했다. 생업 때문에 간병이 어려운 가족을 대신해 활동가들이 그의 재활치료를 돕고 있다.
김 위원장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을들의 피해 현장을 누볐다. 고 효순·미선이 사건이 일어나자 경기 양주 사고 현장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으로 달려갔다. 해군기지가 건설된 제주 강정마을과 서울 북촌마을 임차상인 투쟁 현장에도 머리가 하얗게 센 그가 있었다. 소통이 어려운 김 위원장을 대신해 지인 5명이 들려준 이야기다.
김 위원장은 대학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한 이래 ‘한반도 평화’를 중요한 가치로 삼게 됐다고 한다. 평화협정 실현운동을 하는 시민단체 ‘평화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 창립에 힘을 보탰고, 평통사 사무처장, 여중생 범대위 집행위원장, SOFA(주한미군지위협정)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 등을 지냈다.
김 위원장은 2002년 6월13일 미군 장갑차에 여성 중학생 2명 압사당한 다음날 바로 사건 현장으로 향했다. 희생자의 혈흔, 장갑차 스키드마크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미군 두명이 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자 같은 해 12월 미국 백악관 앞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미국 시민들에게 사건을 알렸다.
황윤미 서울평통사 대표는 17일 “효순·미선이 사건 당시 김 선배는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한 한미관계의 현실을 국민들에게 일깨우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무죄판결 이후 서울시청 일대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김 위원장은 2012년 효순·미선 10주기 추모 토크콘서트에서 “불안정한 정전을 극복하고, 공고한 평화체제로 가기 위한 평화협정 체결이 필요하다”며 “불평등한 한미군사동맹을 막고,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김 위원장은 해군기지 설치 공사가 시작된 제주 강정마을로 내려갔다. 2011년부터 마을회관 등에서 약 2년간 기거하며 강정마을 주민들과 함께 했다. “삶의 터전에 무기가 들어오고 있다” “지리적 요충지인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질 것”이라는 반대 목소리가 나오던 때다. 2011년까지 반대 집회를 열거나 공사장 길을 가로막은 주민과 시민단체 활동가 등 161명이 경찰에 체포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 위원장은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반대 운동을 이어가자고 주민들을 설득했다.
김 위원장이 추구한 또다른 가치는 ‘상생’이다. 2010년대 들어서자 서울 종로구 북촌한옥마을에 젠트리피케이션(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면서 기존 임차인들이 내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전통수공예품을 팔던 김영리 ‘맘 편히 장사하고픈 상인모임’ 위원장 역시 5년 사이 두배로 오른 임대료를 감당하다 “프랜차이즈 커피 매장을 들이겠다”는 건물주에 의해 쫒겨났다. 2016년 강제집행 이후 김영리 위원장 등 상인이 1인 시위를 벌이자 건물주인 새마을금고 측은 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김 위원장은 영세 상인들의 법률대리인 역할을 했다. 삼청새마을금고 측이 상인을 향해 제기한 5건 소송에 대해 117쪽 분량의 피고 의견서를 대신 작성해줬다. 결국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재판부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피고 측 의견을 받아들여 당초 청구된 ‘건물 반경 200m 이내 집회금지’ 대신 ‘100m 이내 금지’를 결정했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청구액 일부만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법이 지켜주지 못한 부분을 시민 마음으로 지켜내자.” 김 위원장의 도움을 받은 김영리 위원장은 위기에 내몰린 영세사업자들과 함께 했다. 6번째 강제집행 끝에 지난해 4월 철거된 을지OB베어 앞을 지키고, 공대위 활동에도 함께 했다.
을지OB베어 단골손님을 통해 상황을 알게 된 김 위원장은 공대위를 결성하고, 특정 업체의 노가리 골목 독식 시도를 공론화했다. 2021년 3월 용역 직원이 들어와 집행을 시도하자 ‘비폭력’을 강조했다. 최수영 을지OB베어 사장은 당시 김 위원장이 용역 직원을 밀거나 때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고, 뒷짐을 지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가게를 지키던 시민을 밀친 용역 직원들에게는 “상생하려는 우리를 막지 마라. 대화 자리를 만들어줘라”고 말했다고 한다.
1심 재판부는 김 위원장에게 징역형을 내렸다. “건물 입구를 둘러싸고 피켓을 들고 서서 구호를 외치고, 집행관 등의 건물 진입을 몸으로 막아 저지했다. 회원 40여명과 공모해 다중의 위력을 보이며 명도집행 직무집행을 방해했다”고 했다. 건강이 악화된 점을 고려해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김 위원장 측은 항소했다. 법률대리를 맡고 있는 조윤희 변호사는 “철거 작업을 했던 이들은 경비 용역으로, 사건 당시 집행관과 직접적 마찰이나 충돌이 없었다. 피켓팅을 하며 서 있던 행위가 폭행인지도 법리적으로 따져봐야 할 부분”이라며 “양형사유에 ‘돌연 이 사건 집행현장에 등장해 외부인으로 공무집행 방해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고 돼 있는데, 김 위원장은 연대인으로서 숭고한 지향을 가지고 사장, 시민들과 함께 했다는 점이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강제집행 전까지 김 위원장과 일면식도 없었다던 최수영 을지OB베어 사장이 말했다. “혼자였으면 ‘어디에 무슨 얘길 해야 할까’ 속앓이 하고 말았겠죠. 김 위원장 만나고 우리의 억울함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 수 있었어요. 시민들이 이 사안에 공감할 수 있게 됐고, 저희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됐습니다.”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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