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폭탄’에 한계 몰린 자영업자, 한국 경제 ‘시한폭탄’ 되나
(시사저널=황건강 중앙SUNDAY 기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진심으로 사과하며 전에 남긴 글을 삭제한다." 지난해 폴 크루그먼 뉴욕대 교수가 트위터를 통해 이사벨라 웨버 매사추세츠 앰허스트대 교수에게 남긴 글이다. 웨버 교수는 2021년 영국 가디언지 기고를 통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가격 통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시장에서 결정돼야 할 제품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건 전통적인 경제학계에서 거론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에 "정말로 멍청하다"고 지적했던 크루그먼 교수가 이듬해 자신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를 남긴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시각이 변한 이유는 '가격 전가력(Priceing power)' 때문이다. 코로나19 확산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가파른 물가 상승이 이어지자 '가격 전가력'이 화두로 떠올랐다. 식품업체들이 물가 상승을 웃도는 과도한 가격 인상으로 소비자들에게 비용 부담을 떠넘기자 선진국들은 식품 가격 상승을 제한하며 물가 잡기에 나섰다. 국내에서도 국제 밀 가격 하락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던 밀가루와 라면, 제과 업체 등이 7월1일을 기점으로 가격 인하에 돌입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체감하기 어렵다고 푸념한다. 밀가루 가격이 내렸는데 외식물가는 그대로라는 생각에서이다.
코로나19 거치며 자영업 수익성 악화
밀가루 가격이 내렸는데도 자영업자들의 탐욕이 외식물가를 끌어올린 걸까. 자영업자들은 오히려 비용 부담에 허덕이는 처지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 강남구에서 8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이진영씨(39)는 "밀가루 가격이 낮아졌다고 하는데 원·재료비 측면에선 일부에 불과하다"며 "다른 비용 부담이 커 영업할수록 빚만 늘어날 판"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가스요금과 임대료, 인건비 등이 지난 몇 년간 가파르게 상승해 여전히 부담이 크다는 얘기다.
전문가들도 일부 식재료 가격 인하는 외식물가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식재료 외에 고정적으로 부담해야 할 부대비용이 상당한 탓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외식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일반음식점의 평균 연간 영업 비용 가운데 인건비(33.7%)와 임차료(9.8%) 등 고정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43.5%에 이른다. 여기에 세금과 공과금(15%)을 포함하면 판매가격의 절반 이상이 원·재료와 무관하게 결정되는 셈이다.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밀가루 가격 인하가 판매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일부에 불과하단 반론이 나오는 이유다.
자영업자들은 최근 수년간 물가 상승은 물론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감염병 예방 비용이 자영업자에게 전가된 탓에 수익 구조가 망가졌다고 지적한다. 원자재 가격이 올라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영업이 제한된 탓에 제때 반영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일부 자영업자 사이에선 '빚내서 연명한다'는 푸념도 나온다. 정부는 코로나19 확산 이후 자영업자들을 대상으로 대출 만기를 연장해 주거나 상환을 유예해 줬으나 망가진 수익 구조를 돌려세우진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연일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우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은행이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에게 제출한 '자영업자 대출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1분기 말 기준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1033조7000억원으로, 코로나19 확산 직전인 2019년 말(684조9000억원)에 비해 50.9%나 늘었다. 자영업자 대출 잔액은 지난해 3분기에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선 후, 매 분기 사상 최대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대출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경고음도 커졌다. 더불어민주당 김회재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해 3월말 기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이 70% 이상인 자영업 가구는 38만8387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영업자 가운데 39만 명가량이 벌어들인 소득의 70%를 대출과 이자 비용으로 쓰고 있다는 뜻이다. 이들의 금융부채를 모두 합치면 109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영업자 대출의 연체율(1개월 이상)은 올 1분기 1%로, 지난해 4분기(0.65%)보다 0.35%포인트 상승했다. 2015년 1분기(1.13%) 이후 8년 만에 최고 수준이다. 더구나 대출을 받은 자영업자 가운데 다중채무자 비율이 56.4%에 이른다. 자영업자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여기저기서 대출을 끌어모아 빚으로 빚을 갚고 있다는 의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는 9월말 자영업자 대출 만기연장·상환유예 종료를 기점으로 자영업자들의 연쇄 폐업이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에 금융 당국에선 한계 상황에 내몰린 자영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오는 9월 '정책서민금융 효율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러나 자영업자들은 본질적인 해법이 되긴 어렵다고 보고 있다. 지난 3년여간 5차례나 만기연장이 진행됐지만 오히려 빚만 늘어났던 만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변화가 절실하다.
"내수 활성화 촉진 등 검토해야"
자영업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경영 환경은 당분간 나아지기 어려운 상황이다. 당분간 외식물가를 좌우할 세부 품목의 가격 상승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탓이다. 지난 6월 한국은행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458개 품목 가운데 세부 품목의 물가 상승 지속성이 가장 높은 분야는 외식물가 차지였다. 보고서에서는 "최근의 외식물가 오름세는 과거에 비해서도 매우 높은 수준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매출도 줄어들 전망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최근 자영업자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매출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 응답자가 50.8%에 이른다. 가뜩이나 원가를 구성하는 세부 품목의 가격 상승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매출마저 신통치 않으면, 자영업자들은 소비자에게 가격을 전가하지 못한 채 또다시 빚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산업본부장은 "자영업자들은 어두운 경기 전망 속에서도 대출 부담으로 폐업하기도 힘든 상황"이라며 "내수 활성화 촉진 등 자영업자의 부담을 덜어줄 정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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