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업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자영업자들
“식당도 밥값 인하해야” 여론에 자영업자들 냉가슴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소비자가격을 내렸으면 좋겠다."(6월18일), "터널(위기)의 끝이 멀지 않았다."(7월12일)
최근 한 달간 국내 소비시장은 정부의 그립(grip·움켜 쥠)과 레토릭(rhetoric·화술)에 이끌려왔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6월 앞장서서 식품기업들에 물가 안정 노력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자마자 실제로 라면, 과자, 빵 등의 가격이 줄줄이 인하됐다.
당시 소비자를 비롯한 일부는 환영 의사를, 식품기업 등 다른 일부는 정부의 과도한 개입에 우려를 표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기업은 어디까지나 수지타산과 정부 압박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은 것뿐이었고, 정부는 존재감을 나타내 국민 여론을 등에 업겠다는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다. 잠깐의 돌풍이 지나가자 가격 인상 움직임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그럼에도 추 부총리는 "올 하반기에 2% 중반대의 물가상승률을 유지할 거라 본다. 터널의 끝이 멀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경제는 심리'라고들 말한다. 비관하지 말고 긍정적인 수사라도 동원해야 상황이 나아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낙관적으로 바라보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경제주체도 존재한다. 바로 자영업자들이다. 정부와 식품기업들이 나름의 명분을 지킨 후 희망 섞인 전망을 하기 시작한 반면, 자영업자들은 더욱 어둡고 깜깜한 터널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여전한 원가 부담에 치솟는 외식물가
시사저널이 7월11~12일 점심 시간대에 서울 강남구·중구·광진구·관악구·용산구 등의 식당가를 돌아보니 가격 인상 안내문과 바뀐 가격표를 여기저기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종합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8개 외식 품목의 5월 서울 지역 평균 가격은 5년 전인 2018년 5월에 비해 28.4% 올랐다. 5년 전 두 사람이 점심을 먹는 데 1만4000원이 들었다면 지금은 1만8000원이 드는 셈이다. 상대적으로 비싼 메뉴를 고르거나 사이드 메뉴를 곁들이면 2만원, 3만원도 우습게 넘어간다.
강남역 인근의 경우 1인분 기준으로 직장인의 대표 메뉴인 돼지불백이 9000원, 돈가스정식이 1만1000원, 김치찌개가 1만2000원 선이었다. 수많은 가게 앞 배너나 메뉴판에는 종이를 덧대거나 펜으로 수정한 흔적이 역력했다. 종종 배너를 유심히 살펴보다 발길을 돌리는 행인도 있었다. 점심값을 조금이라도 아껴보려 김밥집으로 향했다. 포털사이트를 통해 미리 메뉴 가격을 확인하고 들렀더니 3500원이라던 기본 김밥 가격이 언제 올랐는지 4300원이 돼있었다. 가격이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온라인상 메뉴판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달걀부침, 참치 등이 추가된 김밥은 5000원을 넘어갔다. 기본 김밥에 5000원대인 라면을 주문하면 다른 식당 메뉴 가격과 별반 차이가 없어진다.
"밀 싸졌는데 왜 라면값은 그대로냐"
참가격의 8개 외식 품목 조사 결과 5년 새 가장 많이 오른 품목이 김밥이었다. 김밥 가격은 평균 2192원에서 3200원으로 46% 뛰었다. 짜장면(4923원→6915원), 칼국수(6731원→8808원), 김치찌개 백반(6000원→7846원), 냉면(8769원→1만923원), 비빔밥(8385원→1만192원), 삼계탕(1만4077원→1만6423원), 삼겹살(1만6489원→1만9150원·200g 환산 기준) 등 다른 품목도 가격상승률이 만만찮았다. 8개 중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 먹을 수 있는 외식 메뉴는 김밥, 짜장면, 칼국수, 김치찌개 백반 등에 불과하고, 실제 체감상으론 더 적다.
외식물가 상승 추세는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곡물 가격이 불안정한 데다 다른 원·부자재 가격, 물류비, 인건비, 전기·가스 요금 등도 상승한 탓이다. 서민들은 서민들대로 주머니 사정이 팍팍해져 밥 사먹기가 겁나고, 자영업자들은 자영업자들대로 가격 인상 압박과 소비자 모객의 절충점을 찾느라 고심에 빠졌다.
얼마 전 정부의 가격 인하 권고로 식품기업 일부가 소비자가격을 내린 '사건'은 자영업자들에게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왔다. 추경호 부총리는 6월18일 식품기업들을 향해 "밀 가격이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소비자가격을) 인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 등 국내 주요 식품기업들이 전격적으로 라면 소비자가 인하를 결정했다. 제과·제빵업체들도 가격 인하에 나섰다. 국제 밀 선물가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난해 5월 톤당 419달러까지 올랐다가 내림세로 돌아서며 지난해 11월부터 300달러 미만을 유지해 왔다. 6월 가격은 톤당 243달러로 지난해 5월의 58% 수준이다.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는 물론 식당 현장에서도 외식 메뉴 가격이 낮아져야 한다는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강남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허인기씨(가명·38)는 "자주 가던 분식집의 라면 메뉴 가격이 갑자기 많이 올랐는데 '밀가루 가격 상승 때문이겠구나' 하고 대충 넘어갔다. 그런데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면서 "밀가루에 더해 라면 공급가까지 떨어졌으니 상식적으로 가격을 내려야 하는 게 맞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식당 주인들은 식당에 와서 직접 가격을 내리라고 하는 손님도 상당하다고 털어놨다.
공공요금·임차료 부담도 커져
일부 프랜차이즈 가맹본부는 소비자를 다독이고 가맹점주를 보호하기 위해 한시적인 고객 이벤트를 기획했다. 서울 광진구의 어느 유명 중식 프랜차이즈 가맹점 앞에는 '7월 한정 포장하면 짜장면 5000원, 짬뽕 6000원'이라고 적힌 배너가 세워져 있었다. 각각 1500원씩 할인된 가격이다. 강남구의 어느 오므라이스 프랜차이즈 식당은 여름 신메뉴 구매 시 4000원짜리 사이드 메뉴 새우볼을 무료로 제공하는 행사를 시작했다. 기업들이야 전략적으로 가격 인하나 이벤트를 진행할 여력이라도 있지만, 하루하루 버티기에 급급한 일반 자영업자들은 이도 저도 못 한 채 냉가슴만 앓고 있다.
6월 소비자물가 동향을 보면 라면(13.4%)과 빵(11.5%), 스낵과자(10.5%) 외에도 양파(20.5%), 오징어(14.2%), 닭고기(13.7%), 사과(11.1%), 고등어(10.1%), 우유(9%), 고춧가루(8.1%)의 값이 모두 전년 동기와 비교해 훌쩍 올랐다. 도시가스(29%)와 전기(28.8%) 요금 상승 폭도 컸다. 광진구에서 '착한 가격'으로 유명한 치킨집을 운영해온 김태완씨는 "밀가루 등이 저렴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고공행진 중인 다른 식재료를 고려하면 원가 부담이 줄었다고 볼 수 없다"며 "최근 몇 달은 가스요금 인상의 여파까지 더해졌다"고 전했다. 그는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물가로 인해 손님의 발길이 끊기면 그만큼 손해이기에 가격을 결코 함부로 올리지 못한다"면서 "수익성 악화를 버티고 버티다 겨우겨우 올린 결과가 지금 물가인데, 이마저도 계속 추가 상승 압박을 받는 중"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자영업자는 식품업계의 가격 인하 대열에 동네 식당들도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을 두고 "정부가 식품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억지로 내렸다는 가격을 뜯어보면 (제품 하나당) 50~100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고 그리 많은 기업이 참여하지도 않은 가격 인하 조치를 영세한 자영업자들에게도 일괄적으로 요구하는 건 가혹하다"고 토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는 음식점업, 숙박업, 도소매업 등에 종사하는 자영업자 500명을 대상으로 올 상반기 실적 및 하반기 전망을 설문한 결과, 상반기 매출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감소했다는 답변이 63.4%였다고 7월2일 밝혔다. 평균적으로 응답자들의 상반기 매출은 9.8%, 순익은 9.9% 줄어든 것으로 조사됐다. 하반기 매출이 상반기보다 감소할 것이라는 응답이 50.8%로 증가할 것이라는 응답(49.2%)을 앞섰다.
자영업자 10명 중 4명 "3년 내 폐업 고려"
응답자의 40.8%는 3년 내 폐업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주된 이유는 영업실적 지속 악화(29.4%), 자금 사정 악화 및 대출상환 부담(16.7%), 경기회복 전망 불투명(14.2%) 등이었다. 폐업을 고려하지 않는 이들도 특별한 대안 없음(22.3%) 등 부정적 이유를 제시한 비율이 53.1%에 이르렀다.
올해 가장 부담이 큰 경영 비용 증가 항목으로는 원자재·재료비(20.9%), 인건비(20.0%),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18.2%), 임차료(14.2%) 순으로 응답률이 높았다. 임차료 인상의 리스크는 갈수록 더 커지는 중이다. 지난 3년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건물주들이 자발적으로 동결 또는 인하했던 상가 임대료가 최근 재계약이나 신규 계약 과정에서 속속 인상되는 분위기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자영업자들이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메뉴 가격을 올리는데, 정작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가 감소하기에 매출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며 "게다가 코로나19를 거치며 늘어난 채무가 불황과 고금리 상황을 만나 굉장히 우려스러운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했다. 석 교수는 이어 "위기 해소 방안으로 거론되는 최저임금·공공요금 인상 자제 역시 여건상 쉽지 않다. 매출 회복 시까지 대출 만기를 연장해 주는 등의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조치가 불가피해 보인다"고 덧붙였다.
■ 아이스크림·생수·치즈 등 가격은 줄인상
밀 가격 하락과 함께 일부 라면·과자·빵 제품이 조정됐지만, 이런 가격 인하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은 식품기업이 훨씬 많다. 오히려 더 비싸진 가공식품과 프랜차이즈 식당 메뉴도 부지기수다.
롯데웰푸드는 7월 들어 스크류바, 돼지바, 수박바 등의 편의점 공급가를 25% 인상했다. 당초 지난 4월 편의점에 공급하는 아이스크림 가격을 수정하기로 했다가 한 차례 연기한 후 이번에 단행한 것이다. 할인점·일반슈퍼 공급가는 이미 지난 2월에 올렸다. 빙그레도 2월부터 메로나, 비비빅, 슈퍼콘 등의 가격을 인상했다. 비슷한 시기 해태아이스크림은 누가바, 쌍쌍바, 바밤바, 호두마루 등의 가격을 올렸다.
빙과업체들이 제품 가격을 올리면서 3월 아이스크림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13.7% 상승했다. 라면(12.3%), 스낵과자(11.2%), 파이(11.0%), 빵(10.8%)보다 많이 올랐다. 아울러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5월(14.3%) 이후 약 14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생수의 경우 가격상승률이 11년 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6월 생수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12.09로 전년 동월 대비 10.8% 올랐다. 2012년 6월(11.6%) 이후 11년 만에 최고치다. 제주삼다수와 아이시스, 강원평창수 등 주요 생수 제품과 일부 편의점의 자체 브랜드(PB) 생수 가격이 줄줄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대상은 청정원 양조식초와 맑은닭곰탕 등 제품 5종 공급가격을 7월부터 6.8~13.5% 인상키로 했다. 매일유업도 7월부로 치즈 제품 19종의 출고가를 올렸다.
외식 프랜차이즈의 가격 인상 움직임도 활발하다. 빙수 프랜차이즈 설빙은 7월3일 빙수 7종 가격을 평균 8% 올렸다. 2020년 1월 이후 약 3년6개월여 만의 가격 인상이다. 앞서 피자헛은 6월29일 프리미엄 피자와 사이드 메뉴 일부 가격을 올렸다. CJ푸드빌은 6월27일 빕스 샐러드바 가격을 평균 4.9% 인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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