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면서도 우아한 ‘동양의 美’… 어머니 고단한 삶 달래주다[박원순의 꽃의 문화사]
화사한 꽃, 기운 북돋아 주고 활력 줘… 뿌리는 달달한 맛에 독성 없고 스트레스·우울감 완화도
말린 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아들 낳는다는 속설… 관상 가치도 높아 궁궐·사대부 마당에 많이 심어
본격적인 여름철을 맞이하여 더위에 지치기 시작할 무렵 피곤함을 잊게 해주는 꽃이 있다. 무더운 날씨가 무색할 만큼 싱그럽게 피는 꽃이 마음에 생기를 돋워 주는 원추리다. 이열치열이라 할까. 정열의 주황색 혹은 노란색으로 매일매일 피어나는 꽃이 절로 행복감과 열정을 불러일으켜 아무리 힘겨워도 하루하루 뜨겁게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원추리는 원래 한국,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수천 년 전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식용, 약용, 관상용으로 재배되어 왔다. 야생의 자연 서식지에서는 스무 종 남짓 분포하지만 지금까지 자연 교잡 및 변이를 비롯해 수많은 재배가들의 손길을 거쳐 만들어진 변종과 재배품종은 무려 7만5000여 종류에 이른다.
원추리를 한자어로 훤초(萱草)라 하는데, 이를 우리말로 발음하면서 원초, 원초리, 원추리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훤당(萱堂)도 원추리 ‘훤’, 집 ‘당’ 자를 쓴다. 그만큼 원추리는 집 안에서 부녀자들의 고된 삶 가까이에서 꽃을 피우며 늘 그들과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마음을 달래 주던 꽃이었다.
중국에서 훤초는 아주 오래전부터 슬픔을 잊는 풀이라는 뜻의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불렸다.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9∼7세기경 완성된 ‘시경(詩經)’의 위풍편(衛風篇)에 나온다. 전쟁터에 나간 남편 생각에 걱정과 그리움으로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던 여인이 뒤뜰에 망우초(원추리)를 심어 시름을 잊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원추리의 화사한 꽃이 기운을 북돋아 주고 활력을 주어 마음을 위로하고 슬픔을 잊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중국 저장(浙江)성과 장쑤(江蘇)성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슬픔에 빠진 친구에게 원추리 꽃을 따서 대접하는 전통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폴란드 루블린 의과대학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원추리는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실제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완화시키는 물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원추리 약효에 대한 최초 기록은 656년 중국 당나라에서 편찬된 ‘본초(本草)’에 등장한다. 여기서 원추리는 ‘달달한’ 맛이 있고 독성이 없으며 오장육부를 편안하게 해준다고 되어 있다. 또한 마음에 이롭고 행복을 주며 걱정을 줄여주고 몸을 가볍게 한다고도 되어 있다. 1061년 송나라 의학자 소송(蘇頌) 등이 편찬한 ‘본초도경(本草圖經)’에는 원추리를 그린 삽화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원추리의 뿌리가 지닌 진정 효과와 이뇨 작용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민간에서 전해져온 전설과 설화도 소개한다. 그중 원추리를 의남초(宜男草)라 부르기도 한다는 내용이 흥미롭다. 이는 3세기경 진나라 주처(周處)의 ‘풍토기(風土記)’에도 나오는 개념으로, 부인들이 원추리 뿌리를 몸에 지니면 ‘마땅히 사내아이’를 낳는다는 것이다. 민간에서는 이와 유사한 속습이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져 왔다. 가령 원추리 꽃봉오리가 어린 사내아이 고추처럼 생겨 머리에 비녀처럼 꽂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거나, 말린 꽃을 향낭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된다는 설도 있었다. 이 밖에도 1590년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 1613년 허준의 ‘동의보감’ 등 여러 의서에서도 원추리의 약효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원추리의 관상 가치도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특히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원추리는 창덕궁, 경복궁 등 궁궐의 정자 주변이나 화계에서 모란, 작약, 앵두나무, 옥매, 진달래, 철쭉 같은 꽃들과 함께 쓰였다. 그뿐만 아니라 사대부 주택 마당 가장자리나 담장 옆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신사임당(1504∼1551)의 유명한 ‘초충도’에서 원추리는 뛰어오르려는 개구리, 줄기에 붙은 매미, 꽃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 한 쌍과 함께 그려졌다. 사람뿐 아니라 생명을 지닌 여러 작은 생물들도 이 꽃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후기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같은 책에서도 원추리는 중요한 정원 식물로 비중 있게 소개되었다.
동양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우아한 원추리에 대한 기록이 유럽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6세기다. 먼저 네덜란드 라이덴대 의대 교수이자 막시밀리안 2세 황제의 의사였던 도도엔스(Rembert Dodoens)가 1554년 유럽 최초로 원추리 삽화를 그렸다. 그가 그린 종류는 ‘레몬 릴리’라고도 부르는 밝은 노란색의 골잎원추리(H. lilioasphodelus, syn. H. flava)였다. 이어서 플랑드르의 의사이자 약초학자였던 로벨(Mathias de l’Obel)은 1576년 자신의 저서(Plantarum, seu, Stirpium Hitsoria)에서 원추리를 언급했다. 원추리의 영어 이름인 데이릴리(Daylily)는 영국의 약제상 존 제라드(John Gerard)가 1597년 저술한 ‘약초 의학서(Herball)’에 처음 등장한다. 단 하루만 피는, 백합 같은 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시기 원추리를 일컫는 이름과 학명은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은 채 여러 이름으로 혼용되었다. 생물 분류학의 아버지 린네가 1753년 ‘식물의 종(species plantarum)’을 통해 말끔하게 정리해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는 이명법에 따라 원추리에 헤메로칼리스(Hemerocallis)라는 속명을 부여했다. 그리스어로 ‘하루’를 뜻하는 헤메로스(hemeros)와 ‘아름다움’을 뜻하는 칼로스(kallos)가 합쳐진 말이다. 린네는 이 책에서 골잎원추리(H. flava)와 원추리(H. fulva) 두 종을 소개하고 있다. 당시 런던에서 재배 중인 가장 관상가치가 높은 해외 식물을 소개하는 ‘커티스 식물학 잡지’에도 1780년대 후반 이 두 종의 원추리가 생동감 넘치는 채색 판화 그림과 함께 소개되었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후 중국이 강제로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중국의 많은 원추리 종들이 유럽으로 도입되어 신품종 육종의 물꼬가 트였다. 미국으로 원추리가 대거 유입된 시기도 19세기 후반이었다. 미국의 원추리 육종은 20세기 초 절정을 이루었다. 뉴욕 식물원에서 일했던 알로 버뎃 스타우트 박사(Dr. Arlow Burdette Stout, 1876∼1957)의 공이 컸다. 그는 어린 시절 씨앗도 없이 스스로 번식하는 원추리 종류에 매료되었다. 1921년 그의 첫 번째 논문 주제도 원추리의 불임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30여 년에 걸쳐 그는 평생 원추리를 공부하고 수집하며 무수한 교배 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1929년 첫 교배종 ‘미카도(Mikado)’를 필두로 100여 종의 원추리 신품종을 만들어 냈다. 1934년 ‘원추리(Daylilies)’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한 그는 오늘날 현대 원추리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946년엔 미국 원추리 협회(American Daylily Society)가 설립되었다. 원추리 재배를 장려하고 그 즐거움을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다. 협회는 매년 다른 장소를 선정하여 총회를 개최하며 신품종 소개, 새로운 육종 기술, 재배 방법 등을 공유하는 자리를 갖는다. 또한 매년 독특하고 아름다운 12종의 품종을 선별하여 시상을 진행하는데, 스타우트 박사를 기리기 위해 영예로운 스타우트 실버 메달을 수여한다.
영국 왕립 원예협회(RHS)의 방대한 정원 식물 데이터베이스인 플랜트 파인더(Plant Finder)에도 3500여 종류의 원추리 품종이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원추리는 오랫동안 많은 정원 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원추리 꽃을 자세히 보면 꽃잎인지 꽃받침인지 구분이 분명하지 않은 6개의 꽃덮이조각(화피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쪽 3개의 꽃덮이조각을 외화피편, 안쪽 3개의 꽃덮이조각을 내화피편이라고 하는데, 원추리 품종의 다양성은 이 화피편들의 색깔과 모양의 수많은 조합에 있다. 외화피편이 내화피편보다 진한 색을 띠거나 서로 다른 색을 지니기도 하고 꽃 중심부 부분에 다른 색깔의 고리 모양 띠가 형성되기도 하며, 화피편의 주맥이 주변부와 대비되는 빛깔을 띠는 품종도 있다. 전체적인 꽃의 모양에 따라서는 삼각형, 원형, 겹꽃, 별 모양, 거미 모양의 다섯 가지 모양으로 구분한다. 꽃 색깔은 하얀색, 노란색, 주황색에서 진한 보라색까지 파란색을 제외하고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원추리는 비탈진 사면부 등 넓게 펼쳐진 야생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군락으로 식재해도 좋고 여러 종류의 관목과 그래스류, 꽃들이 어우러진 혼합 식재 화단에도 잘 어울린다. 키 작은 품종은 화분에 식재해도 좋다. 원추리의 한 송이 꽃은 단 하루만 피고 지지만 하나의 꽃대에서 가지를 치며 많게는 10개 이상의 꽃송이가 차례차례 피어나 전체적인 개화기는 3주 가까이 될 수 있다. 개화기가 다른 여러 품종들을 함께 식재하면 늦봄부터 늦여름까지 매일매일 피어나는 다양한 원추리 꽃을 만끽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원추리 종류는 일찍이 중국에서 들어와 널리 재배된 원추리(H. fulva)와 왕원추리(H. fulva f. kwanso)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태안원추리(H. taeanensis), 홍도원추리(H. hongdoensis), 백운산원추리(H. hakuunensis)를 비롯해, 꽃대가 가지를 치지 않는 큰원추리(H. middendorffii), 야간에 개화하는 노랑원추리(H. thunbergii) 등 이 땅에 자생하는 원추리들이 많으므로 앞으로 이들 소중한 식물자원을 지키고 사랑하는 일에도 관심을 쏟을 일이다. 옛날 안마당에 피어 사람들의 시름을 잊게 하고 마음을 어루만져 준 망우초는 오늘날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도 여전히 행복과 기쁨의 전령사로 피어나 이 무더운 여름을 함께하고 있다.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 실장
■ 원추리
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중국 원산이다. 꽃이 하루만 피고 시들어 데이릴리(daylily)라는 영명으로 불린다. 적황색 꽃이 6∼7월에 피고 열매는 9월에 삭과로 달린다. 예로부터 식용, 약용, 관상용으로 쓰여 왔는데, 훤초, 망우초, 황화채, 금침채, 의남초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다양한 토양 환경에 잘 적응하고 건조에도 강한 저관리형 정원 식물로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여 사면 녹화용 지피 식물로도 좋다. 씨를 뿌리거나 큰 포기를 형성하는 덩이뿌리를 나누어 번식한다. 인도볼록진딧물이 잘 생기므로 고추나무, 말오줌때 등 기주식물을 근처에 심지 않도록 하고 발생 초기에 철저히 방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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